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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 만복사지를 찾아가다.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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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복사지 전경
사적 제349호 만복사지는 통일신라시대 후기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 전하지만 근거가 빈약하고 폐사지에서 확인되는 불교유물이 고려 문종(1046~1083)이후의 것으로 정확한 사찰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만복사는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싸움으로 소실되고 숙종 4년(1679) 남원부사 정동설에 의하여 복원 중창사업을 시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다. 동국여지승람 편에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에 35척 금동불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번 방문에 길거리 있던 불두가 조립되어 있었다. 폐사지의 가람구조는 1탑 3금당식으로 삼층석탑(보물 제30호), 석불입상(보물 제43호), 석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인형 및 금당터가 단정하게 정리되어져 있으며, 김시습은 만복사를 무대로 만복사저포기라는 한문소설을 남겼다. 만복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0호) 절터 중앙에 목탑지 흔적과 발굴을 통해 오층석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 있고 단층기단 위 오층 탑신을 올리고 목조건축 지붕처럼 지붕돌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있는 특징과 1968년 보수하던 중 1층 몸돌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어 고려 문종 당시 세워진 현존하는 총 높이는 5.75m 탑이다.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세운 것으로, 높은 받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현재 남아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은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첫 번째층이 유달리 높다. 각층 몸체의 귀퉁이에 기둥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마다 귀퉁이 아래를 약간 치켜올렸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리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이 특이하다.’ 만복사지당간지주(보물 제32호) 기교가 전혀 보이지 않는 단순하고 밋밋한 당간지주로 석인상 뒤편에 서 있다. 당간지주는 깃대를 고정하기 위해 구멍을 세 군데 뚫어 놓았으며, 기단은 매몰된 상태라 알 수 없다. 당간지주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문 앞에 내걸던 일종의 깃발로, 거기에는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그림을 그렸다. 당간지주는 이러한 깃발의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웠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커다란 돌을 아무런 꾸밈없이 거칠게 다듬어 육중하면서도 소박한 멋을 풍긴다. 흙에 묻힌 받침부를 고려하면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보인다.’ 만복사지석좌(보물 제31호)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석좌로 하나의 돌에 특이하게 육각형의 상. 중. 하대를 조각하였다. 하대는 안상과 꽃, 연꽃을 새겼으며, 중대는 기둥을, 상대는 연꽃과 불상을 세우기 위한 네모 구멍을 뚫어 놓은 고려시대 작품이다. 고려시대 석좌로 추정하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팔각형식을 벗어나 육각이라는 독특한 부분과 고려시대 양식으로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하는 수법 때문이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육각형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꽃끼리 눈 모양을 새기고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중간부는 아래쪽보다 너비가 줄어들었는데, 모서리마다 짧은 기둥모양을 새겼다. 윗부분은 다시 넓어지며 그 옆면 역시 연꽃으로 장식하였던 듯하다. 위쪽 바닥 중앙에는 불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파 놓은 사방 30cm 가량의 네모난 구멍이 있다. 이 석좌는 높이 1.4m 정도인 하나의 돌에 전체를 조각했는데, 육각형 모양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만복사지석불입상(보물 제43호) ▲ 만복사지석불입상 측면
화강암 재질을 이용하여 만든 높이 2m의 석불로 정면과 후면에 부처가 새겨있다. 정면에 새겨진 부처는 손을 따로 끼우도록 만들어 놓았지만 지금은 손부분이 없어 정확한 지인이나 사물을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원만하면서도 다소 위축된 모습을 하고 뒤편에 있는 광배는 연꽃잎과 연꽃줄기를 새기고 불꽃무늬를 조각하였다.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은 고려초기에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만든 것으로, 바위에 부처의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다. 부처 바깥쪽에는 몸에서 발하는 빛을 묘사한 광배를 조각했는데, 위쪽 일부가 없어졌다. 받침으로는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위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다. 머리의 윤곽은 뚜렷하고 고수머리는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얼굴은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에 미소를 머금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어깨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자락과 원만한 굴곡을 이루는 몸매가 어우러져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뒷면에는 부처의 서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만복사지 석인상 ▲ 도로변에 묻혀 있던 석인상 만복사지 유물 중 가장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이 도로변에 머리만 불쑥 내밀고 있는 인왕상이었다. 주로 신라석탑에서 많이 확인되는 붑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가 불탑에서 나와 사찰의 문지기로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왕방울처럼 굵은 눈과 두툼한 입술은 위압감을 더해주며, 일부는 석인상을 석장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은 12척의 거구이지만 땅 속에 묻혀 머리만 위로 향한 채 사찰입구를 수호하고 있었는데 이번 방문에서 세워진 모습을 처음으로 만났다. 만복사지 석인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복사지 석인상은 본래 만복사지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m 떨어진 곳에 2기가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어 사고위험이 높은 1기의 석인상을 이곳으로 옮겼다. 석인상의 형태는 사각형의 돌기둥에 3개의 면만을 사용하여 사람 형상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은 편평하게 다듬었다. 다듬은 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확인되는데, 위쪽 구멍은 머리 정상부에서 아래쪽으로 122cm, 두 번째 구멍은 318cm 내려온 곳에 있다. 석인상의 머리부는 정상부가 둥글고 볼록하게 솟아있으며, 얼굴은 안구를 심하게 돌출시켜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다. 몸통부는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체이며, 오른손은 완전히 구부려 주먹에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물건을 쥐고 있다. 군의는 허리부분에서 묶어 상단부 옷자락이 밖으로 뒤집혀 늘어뜨렸으며, 옷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게 돌출시켰다. 하반신은 수직으로 늘어뜨린 옷주름에 가려졌고 다리부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다리의 아래쪽은 대좌를 사용하지 않고 사각형의 돌기둥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석인상의 전체 높이는 550cm이며 머리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는 370cm 내외이다.’ 만복사지와 도선국사 창건에 관하여 한번쯤 생각해 볼 것은 왜 만복사의 창건이 도선국사와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점으로 우선 도선국사의 풍수설을 유추할 수 있다. 만복사지는 철저하게 풍수에 의해 조성된 비보사찰로 만복사지 일대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남원을 흐르는 요천과 축천이 배의 형상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쌓은 토성과 산이란 지명만 부여한 조산동 그리고 밧줄을 묶어둔 고리봉 등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 터에 절을 세울 사람은 도선국사 뿐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례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지는 창건 후 수차례 중창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도선국사가 창건 후 소실되자 고려 문종 당시 대대적인 중창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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