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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트레킹 - 제2편 재약산- 사자평습지-층층폭포-표충사

허영꺼멍 2016. 6. 2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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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천황산(사자봉)-재약산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표충사-1.5km-한계암-3.0km-천황산(사자봉)-1.0km-사자평-0.8km-재약산(수미봉)-1.0km-고사리분교터. 사자평습지-0.85km-표충사 방향 갈림길-0.3km-층층폭포-3.2km-표충사 순으로 대략 11.65km 정도 추정된다.




가자 재약산(수미봉) 정상을 향하여


▲ 사자평에서 바라 본 재약산(수미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사자평에서 올려다 보면 보이는 산이 재약산이다. 재약산을 오르지 않고 억새숲길을 따라 표충사로 내려서도 되지만 일단 오른 길이고 보면 재약산 수미봉을 거쳐 내려서기로 결정하고 사자평 억새데크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출발을 한다.


▲ 재약산 정상 전망데크

▲ 제약산(수미봉) 정상석

재약산을 힘겹게 올라 정상에 도착하니 시원한 전망대와 함께 주변에 기암암석이 다양한 모습으로 호위하고 눈 아래로 사자평 습지지구가 시원하게 그려진다. 재약산 정상에서 하산길 전 구간이 나무데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간 중 파란색 데크에서는 그늘이 없다.


▲ 재약산 정상 데크에서 바라 본 사자평습지 지역 방향 하산길

▲ 재약산(수미봉)데크에서 바라 본 재약산 정상석이 있는 정상 암봉

▲ 데크에서 조망하는 사자평습지보전지역

수레로 운반해야 할 만큼 산약초가 많이 나는 산, 산에서 자라는 모든 것이 약초가 된다하여 부르는 산 바로 그 산이 재약산이다. 또한 재약산은 신라 어린 화랑이 수련하던 곳이자 사명대사와 관련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이곳 약수물로 흥덕왕 셋째 아들이 병을 고쳐 재약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 정상으로 부터 내려서는 데크길

재약산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비탈진 산길을 훼손하지 않도록 아예 하산길 전체구간을 나무데크로 연결 해 놓았다. 데크를 따라 내려서는 하산객도 지겨운데 올라오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데크는 파란색 고무천을 깔아 놓은 구간은 그늘이 없으며, 검은색을 깔아 놓은 곳은 그늘지역이라 걷기가 편하다.


임도를 만나다.

그리고 고사리분교터와 사자평 습지보호구역


▲ 재약산 정상에서 내려서면 만나는 임도.


재약산을 내려서면 큰 임도를 만나게 된다. 임도는 사자평 습지보호지역으로 이어지며, 재약산 동남쪽 7부능선 사면인 720-760m 고원에 펼쳐져 있다. 습지보호지역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옛 고사리분교터에 도착한다. 고사리분교는 터만 남아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처음 사자평을 찾아왔을때는 학교도 만났고 그곳에서 동동주를 팔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없다.


▲ 습지보호구역

▲ 고사리분교 터 주변 전경


고사리분교터에서 다시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중간 중간 내려서는 길을 만나게 되지만 계속 작전도로를 만날때까지 내려서다보면 층층폭포, 표충사로 내려서는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작전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표충사까지 5.8km 구간이며, 폭포길로 내려서면 4.0km 구간이다. 다리가 불편하거나 내리막 산길을 걷지 않겠다면 작전도로를 따라 내려서도 좋다.


작전도로 입구에서 표충사 방향계곡으로

내려서면 만나는 층층폭포


층층폭포에 도착하니 가뭄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바위에 겨우 가냘픈 물줄기가 흘러 내릴 뿐이다. 층층폭포는 상단폭포와 하단 폭포로 나눠지는데 상단 폭포는 흔들다리가 폭포 앞을 통과하며, 폭포로 내려설 수도 있다. 하단폭포는 상단폭포를 지나 조금더 내려서면 계곡으로 내려서는 희미한 숲길을 따라 조금 내려서야 한다.


▲ 가뭄이 얼마나 심각한지 폭포가 말라 있다.


긴 가뭄 탓인지 발을 담그기 위해 돌을 옮겨다 보니 돌 아래 있던 가재가 황급히 자리를 뜬다. 첩첩산중 물이 그만큼 맑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층층폭포에서 표충사까지 약 3.2km 구간을 더 내려서야 한다.


▲ 돌 속에 숨은 가재


층층폭포를 지나 흑룡폭포를 조망하다.


층층폭포에서 약 1.2km 좁은 등산로를 따라 내려서면 햇살이 뜨겁게 스며드는 절벽 위 서게된다. 평풍바위를 배경으로 바위산 협곡을 따라 기세 좋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만나는데 바로 흑룡폭포이다. 폭포 방향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아찔한 폭포를 보는 순간 힘겹게 온 수고로움이 한방에 보상되는 느낌이다.


▲ 깊은 골짝 떨어지는 흑룡폭포. 가는 길이 없어 멀리서 바라 볼 뿐이다.

▲ 병풍바위

▲ 폭포 중간에 기묘하게 자리잡은 바위


급경사 비탈을 딛고 오른 만큼 자연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에 감탄과 탄성이 이어지지만 아쉽게도 폭포 가까이 접근을 할 수 없을 만큼 협곡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폭포가 바로 흑룡폭포이다. 흑룡폭포로부터 2.8km 내려서면 표충사를 약 1.2km 남겨두면서 계곡을 건너 편한 산길을 걷게 된다.

계곡을 건너 표충사로 내려서다


  

한차례 등산로를 이탈하여 하산을 하고 다음기회에 다시 오를까 생각했던 산행길이었다. 넘쳐나는 계곡의 하얀 속살과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보려던 계획은 또다시 긴 여름 장마가 끝나는 날 다시 찾아오기로 하며 계곡 마지막 길에서 처음으로 계곡에 발을 담아 본다. 그리고 출발할 때 스쳐갔던 표충사를 잠깐 둘러보고 가기로 한다.


밀양 표충사


얼마나 많은 스님이 숲에서 자란 장작 위 연기되어 열반에 드시고, 계절의 길목을 지켜 왔을까. 한때는 1천여 명의 스님이 머물렀지만 그 세월도 잠깐이라 폐허가 되니 불심이 사라질 법도 하지만 광해군 2(1610) 혜정이 중창하여 또다시 불심이 부흥을 꾀하지만 현종 연간에 이르러 또 다시 폐사지경에 이르니 영정사의 업보이련가. 흥덕왕 4(829) 서역승이 맑은 물을 이용해 환자를 고쳐주며 주민들이 뜻 모아 만든 영정사는 일년스님이 머물기도 하였지만 그 생명을 다하고 사라지는가 싶더니 현종5(1839) 사명당의 법후손 월파스님이 예조의 승인을 받아 무안의 표충사를 옮겨 "표충사"라 부르니 오늘날 모습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 표충사 경내로 들어선 후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만나는 전경


▲ 범 종각

독특한 사찰 밀양 표충사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4-2

★★★★☆


표충사가 옮겨간 텅 빈 그 자리는 표충비만 남아 지금도 나라의 힘든 일이 생기면 땀을 흘리니 이것이 바로 사명대사의 영험한 예언이 아닐까 싶다. 무안은 표충사와 가까운 거리로 사명대사 고향이다. 표충사는 유교서원과 불전이 공존하는 특이한 사찰이다. 표충사 경내에 자리한 표충서원에는 사명대사 유정, 서산대사 휴정, 기허대사 영규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표충사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형식을 하고 있는 높이 7.7m3층 석탑이다. 석탑기단은 단층이며 면석은 5매로 구성되고 우주와 탱주1주가 있어 각면을 2구로 구분하고 있으며 보물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다.

▲ 측면에서 바라 본 삼층석탑과 석등

표충사 석등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기둥돌과 등을 넣는 화사석, 화사석을 받쳐주는 위 받침돌, 지붕돌 등을 모두 갖추고 탑 앞에 바짝 붙어 이다. 탑의 조각기법을 통해 통일신라 말기~고려 초기 석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 표충사 팔상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1호 팔상전은 부처의 생애를 여덞 가지 그림으로 제작한 탱화를 모신 법당으로 표충서원에 있던 것을 1971년 옮겨 온 것이다


▲ 표충사 만일루

표충사 만일루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로 H자로 조성한 보기드문 건축양식으로 철종11(1860) 당시 방장 월암상인이 조성한 것으로 본래 48칸의 선실을 108평 대지 위 만든 후 "동림고사"로 부르다1962년 소실 후 중건과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만일루는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하신 효봉대종사께서 말년을 보내며 열반에 든 장소이기도 하다.


표충사 명부전(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43호)

▲ 표충각

▲ 표충사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 중심불인 석가모니불

표충사 대광전은 표충사의 중심 법당이다. 법당 내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질별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을, 서쪽으로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대광전은 아쉽게도 신라 시대 창건 후 전란으로 소실되자 1929년 정면 5, 측면 3칸의 단층 팔작 다포계 양식으로 지었다.



▲ 측면에서 본 모습. 양쪽에 왼편으로 3개의 잡상이, 오른편으로 2개의 잡상이 올려져 있다.

궐 지붕 귀마루 독특한 형상을 한번쯤 본 기억은 있을 것이지만 자세하게 그 형상을 들여다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일반 민가에서는 아무리 권세가 높다하여도 지붕 귀마루에 형상을 올린다는 것은 당시 시대적으로 허락되지 않을 만큼 특정한 일부의 시설에 한하여 올려졌는데 그 형상이 서유기(西遊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는 표준 잡상에 관하여 대당사부(大唐師傅), 손행자(孫行者),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인데 대당사부는 삼장법사, 손행자는 손오공, 사화상은 사오정이라 하며, 이처럼 귀마루 위에 올려진 조각품을 두고 잡상(雜像) 또는 어처구니(於處軀尼), 상와(像瓦)라 한다.


▲ 표충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표충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서산, 사명, 기허당을 모신 곳으로 무안면 중산리 삼강동에 사당으로 세워졌다 조선 헌종 5(1839) 영정사터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표충서원 편액을 걸었고 이로인하여 영정사는 표충사로 고쳐졌다. 절 안에 서원이 한 울타리를 두고 있는 독특한 사찰 내 공간이었으나 고종 5(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피해가지 못하고 건물은 훼손되고 사당은 불전으로 바뀌었다. 이후 건물은 제건되었으나 사찰 내 서원과 사당이 나란히 있을 수 없다는 주장에 1971년 사찰 공간 아래에 내려 조성하였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창건 후 이름을 죽림사(竹林寺)라 불렀다. 흥덕왕 4(829) 인도스님 황면선사가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시고 한반도를 유람하던 중 재약산 오색서운을 보고 삼층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게 된다. 당시 홍덕왕의 셋째왕자가 풍병으로 고생하며 영산 약수를 찾던 중 죽림사에 머물게 되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병이 완쾌되자 왕이 사세를 확장하고 절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 한다. 1592(선조 25)임진왜란으로 사찰은 폐허로 변하자 현종5년 사명당 법후손 월파스님이 무안의 표충사를 표충서원으로 옮겨 임진왜란 당시 의승대장인 사명, 서산, 기허 세분을 모시면서 영정사는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된다.

 

표충사는 고려시대 일연선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탈고 하였으며, 충렬왕은 "과연 천하명산"이라 감탄하여 동방제일의 선찰이라 불렀다 한다.


산행을 마치며



전전날부터 날씨가 잔뜩 찌푸렸다. 일기예보에 금요일 날씨가 맑다는 소식에 일단 출발을 금요일로 잡았다. 큰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사실 개인적 체력으로 오늘 코스는 부담이었다. 출발부터 돌아오는 구간이 결코 쉬운 거리가 아니며, 등산로 역시 부담을 주는 급경사 지역이 산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총 거리 대략 12km 정도 걸었지만 소요시간은 8시간 이상 걸렸다. (폭포에서 잠시 쉬어 간다는게 너무 지체하였다) 출발 7시30분, 하산 3시30분으로 총 8시간 소요.


제1편 표충사-한계암 천황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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