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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260호 병산서원(屛山書院) | 여행일자 : 2016년 0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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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2.6km 비포장도로 구간을 달려간다. 하회마을 주차장에서 병산서원까지 약 6.4km 이며, 하회삼거리에서 병산서원까지 약 4.9km 이다, 시대가 아무리 첨단화되고 도로 확장공사를 하여 비포장도로가 없다 말 하지만 하회마을길과 달리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은 퍽 너털스럽다. 아직도 비포장 상태로 위태위태한 산길을 따라 2.6km 정도 달려야 병산서원이 나온다. 비포장 길은 낙동강을 다라 절벽을 만들고 그 위로 겨우 길을 열어 놓았는데 자칫 방심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 이어진다.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좁은 비포장도로 ▲ 병산서원 첫 출입문 '복례문' 앞 어린 배롱나무가 도열해 있다.
서원건축의 백미 병산서원(屛山書院)의 9월은 사뭇 남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서원 입구 어린 배롱나무 호위를 받고 복례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려 380년 이상 된 노거수 배롱나무가 드려내는 요염한 붉은 자태에 푹 빠져든다. 특히 존덕사 주변에서 그려내는 도도한 아름다움은 자연과 하나 됨을 바라던 사림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복례문(復禮門)을 통과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5대 서원으로는 도동서원, 도산서원, 소수서원, 옥산서원, 병산서원으로 이들 서원의 특징은 전학후묘(前學後廟) 배치를 엄격하게 따랐다. 전학후묘란 정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쪽으로 공부하는 강학공간으로 동재와 서재를 두며, 중앙에 강당을 짓고 서원 뒤쪽 가장 높은 곳에 제향공간을 둔다. 병산서원은 정문 역할을 하는 복례문을 시작으로 만대루를 지나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자리한다. 동재 뒤편 고직사는 서원 관리인 거처이며, 입고당 서쪽 뒤편 장판각은 목판 유물을 보관하였다. 입고당 동쪽 뒤편으로 내삼문과 존덕사 사당이 있지만 출입을 금지하며, 내삼문 동쪽으로 전사청을 두었다. ▲ 복례문 너머 만대루가 이어져 있다 복례(復禮)는 논어 ‘克己復禮爲仁(극기복례위인)’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있으며, 1921년 입교당 중건일기에 의하면 만대루 동편에 있던 문을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기 위해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옮겨온 문이라 그런지 대부분 서원이 삼문(三門)구조를 하고 있지만 이곳 병산서원은 솟을삼문을 만들고 중앙에 문을 만들어 놓고 있다. 광영지(光影池) 첫 대문인 복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만대루로 오르기 전인 왼편 담장아래 사각형으로 조성된 작은 연못으로 이를 광영지라 부른다. 광영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 광영지가 커다란 한송이 꽃이 되어 피어나다. 작지만 절재미를 더해주는 광영지의 9월은 붉은 꽃눈 가득한 꽃으로 피어난다. 광영지 주변과 언덕 위 심어져 있는 배롱나무 꽃잎이 광영지에 떨어져 빈틈없이 가득 채워 놓으면서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만대루(晩對樓) 복례문에서 계단을 딛고 오르면 서원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듯 늘어선 건물 밑으로 지나게 되는데 이곳을 만대루라 한다. 만대루(晩對樓)에서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 라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말을 인용하였다 한다. 만대루에 오르면 과연 그러하다 할 만큼 병산 절벽 앞 흘러가는 낙동강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정자에 올라 선 느낌을 준다. 넉넉함 또한 느낄 수 있을 만큼 서원에서 가장 긴 7칸 건축을 통해 많은 사람이 만대루에 올라 비경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배례하였다. ▲ 만대루 만대루(晩對樓)에서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 라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말을 인용하였다 한다. 만대루에 오르면 과연 그러하다 할 만큼 병산 절벽 앞 흘러가는 낙동강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정자에 올라 선 느낌을 준다. 넉넉함 또한 느낄 수 있을 만큼 서원에서 가장 긴 7칸 건축을 통해 많은 사람이 만대루에 올라 비경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배례하였다. 옛 선조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 하였음을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제각기 자란 나무를 가공 없이 사용하여 삐뚤삐뚤하다. 계단도 통나무를 이용하여 전혀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덕분에 후손들은 건축미가 빼어난 병산서원 만대루를 칭송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옛 선조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 하였음을 만대루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제각기 자란 나무를 가공 없이 사용하여 삐뚤삐뚤하다. 계단도 통나무를 이용하여 전혀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덕분에 후손들은 건축미가 빼어난 병산서원 만대루를 칭송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 만대루를 오르기 위해 통나무를 다듬어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현재 출입금지) 만대루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이다. 200여 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직한 장대한 이 누각에는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이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 중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만대루에서 바라보이는 산 정상 가까이 기암괴석이 보이며, 뒷산은 화산(330m) 흐르는 물줄기는 화천인데 서원에서 바라보면 화산이 흡사 병풍을 두른 듯 하여 병산서원이라 한다. 병산서원 주차장 앞으로 열려진 복례문을 지나면 긴 장축을 연상케 하는 만대루가 공간을 협소하게 할 만큼 가로막고 있지만 올라서면 전혀 다른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는다. 입교당(立敎堂) 1987년 3월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안동의 서남쪽 방향 낙동강 상류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안동하회마을과 인접한 조선시대 교육기관 이였던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본래 풍산유씨의 교육기관이던 풍악서당을 유성룡(1542~1607)이 선조 5년(1572) 이곳으로 옮겨왔다. ▲ 만복대에서 바라 본 입교당(병산서원) 병산서원의 전신은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이며, 선조 5년(1572)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 선생이 오늘날 위치로 옮겨왔고, 서애 류성룡이 1607년 타계하자 지방 유림은 추모하기 위해 광해군 5년(1613)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며 시호를 문충(文忠)이었다. 다음해 광해군 6년(1614) 병산서원으로 개칭되었다. 광해군 12년(1620) 유림은 위패를 여강서원(廬江書院) 옮기며, 인조 9년(1629) 비어있던 존덕사에 별도의 위패를 모시며, 셋째 아들 수암(修巖), 조선 중기 문신 류진(柳袗. 1582-1635)을 추가 봉안하였다,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으로 복례문, 만대루, 동서재, 입교당, 장판각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신문, 존덕사, 전사청을 갖추면서 정식 서원의 틀을 갖추게 되었으며 철종 14년(1863) ‘병산(屛山)’이란 사액을 하사받았다. 그 후 고종 5년(1868) 홍선대원군은 전국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당시 병산서원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무렵 대대적인 보수과정을 거쳤다. 강당은 1921년,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른다. ▲ 불을 밝히는 정료대와 그 앞에 무궁화 한그루가 있다. ▲ 병산서원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서애 류성룡(1542~1575)이 선조 8년(1575)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모습이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그를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 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홍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 입교당 뒷 창문으로 걸려있는 여름 전경 서원 규조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단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 있는 것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이고, 입고당의 서쪽 뒤편에 서 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다. 입고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이 있다. 열려 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 있다.” ▲ 입교당 마루에서 뒷편 3개의 창을 열어 두었다. ▲ 입교당에서 바라 본 만복대 전경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은 퇴계 선생의 문인 출신으로 선조 2년(1569) 명나라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오는가 하면 여러 간직을 거쳐 1588년 대재학, 1590년 우의정, 1591년 좌의정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혼탁해지자 임진왜란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명장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을 등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경북 의성군 사촌마을에서 출생, 선조 30년(1597) 그의 나이 56세가 되던 해 5차례 사직을 하려 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다음해인 선조 30년(1597) 11월 19일 파직되고 12월 5일 북인들의 탄핵으로 삭탈관직 되자 58세가 되던 선조 32년(1599) 2월 16일 하회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사에서 이순신과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류성룡은 권율장군을 의주목사로, 이순신 장군을 전라도좌수사로 천거한 인물이다. 1600년 복관되었지만 벼슬길을 거부하고 은거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 입교당에서 바라 본 모습 병산서원 현판에서 담대함을 느낄 수 있다. 병산서원의 모태는 본래 풍악서원으로 서애 류성룡 죽음 사후 제자 우복이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철종 14년(1863)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1987년 3월31일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안동의 서남쪽 방향 낙동강 상류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병산서원의 중심 건물이자 강당으로 본래 숭교당(崇敎堂) 또는 명륜당으로 불렀다.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기와집으로 서쪽에 오늘날 교무실에 해당하는 경의재(敬義齋)를 두고 동쪽에는 명성재(明誠齋)를 두고 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만대루와 입교당 중간공간 좌, 우에 자리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유생이 머물던 오늘날의 기숙사로 방에는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칙에 따라 동재는 나이가 든 상급생이 머물며, 서재는 젊은 하급생이 머물던 공간이다. 신문(神門) 및 존덕사(尊德祠) 중심건물인 입교당 뒤편 공간으로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옆 제향공간인 존덕사 입구를 신문이라 한다. 신문은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으로 향사(享祀)때 제관(祭官)에게만 허용된 출입문으로 대문에는 태극형상과 주춧돌 위 기둥을 세웠는데 괘를 새겨놓았다. 또한 신문 주변으로 오래된 배롱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 존덕사로 향하는 계단 입구 신문 주변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만개하였다. ▲ 제향영역 신문 입구 전경 ▲ 신문 입구 태극괘 태극 괘가 그려진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존덕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내삼문과 존덕사 사이 오른편에 관세대, 정로대가 자리 잡고 있다. 존덕사 옆 담장에는 전사청이 있으며, 내삼문, 존덕사, 전사청 공간을 두고 제향영역이라 한다. ▲ 진사청으로 향하는 외문 병산서원 제일 상단에 위치한 제향영역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제향 영역은 향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애 류성룡(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이자 제자인 수암 류진)1582~1635)의 위판을 모신 존덕사가 있다. 류진이 이곳에 추가로 배향된 것은 현종 3년(1662)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좌우로는 담장을 둘렀다. 경사진 지형에 서원을 짓고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한 것도 이러한 까락에서이다. 또한, 강학 공간은 선비 정신에 따라 검소하고 단아하게 꾸민 데 비해, 제향공간은 단청도 하고 태극문양으로 장식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전사청(典祀廳) 배롱나무로 가득한 공간이 전사청이다. 사방 배롱나무 가득한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기 전 제수를 준비하거나 제사용품을 보관해 두는 곳으로 대부분 같은 담장 안에 있거나 쪽문을 두고 이동을 편하게 하지만 이곳은 존덕사로부터 내려선 공간에 그것도 다른 담장을 한 독립적 영역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 전사청 그리고 좌,우 배롱나무가 공간을 가려 놓고 있다. ▲ 전사청에서 바라 본 고직사 안내글에는 전사청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과 같은 울타리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서원의 전사청은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내삼문의 동쪽에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음력 1일~ 10일) 사이의 날 중 천간에 정(丁)으로 된 날)에 향사를 지낸다.” ▲ 병산서원 배롱나무 배롱나무는 껍질을 다 벗는 독특한 나무특성으로 인해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의미로 절간이나 청렴한 선비를 상징하여 서원에도 심었는데 특히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1542-1607)과 셋째 류진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며, 대원군 서원철폐령에도 온전하게 보존된 47개 서원 중 한 곳이다. 6월부터 9월까지 약 100일간 분홍빛 흥건한 꽃 피우는 배롱나무(백일홍)가 서원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수령 380년을 훌쩍 넘긴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6그루의 배롱나무는 1614년 류성룡 셋째아들 유진 선생이 존덕사를 조성하면서 심은 나무로 2008년 경북도에서 희귀목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배롱나무는 사찰과 선비들이 거처하는 공간, 무덤 등에 많이 심는데 스님은 껍질을 벗어 버리고 자라는 모습을 통해 세속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마음에, 선비는 청렴을 강조하는 의미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꽃이 무려 100일간 피고지고를 거듭한다는 것과 7월 말부터 8월초 꽃이 만개하면서 주변 건물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까지 약 3.9km 걷는 산책길이 나온다.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을 찾아 왔다 잠시 머물다 되돌아 발걸음 했을 산길은 낙동강 물자락을 따라 자연스럽게 길을 내 놓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병산서원 배롱나무가 점점 병들어 간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 선비의 정신을 대변해 주던 배롱나무가 올해는 더 많은 가지를 통해 연분홍빛 꽃을 피워주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병산서원을 떠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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