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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트레킹 - 경주 첨성대 주변 여행 따라가기

허영꺼멍 2016. 10. 1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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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주변 따라걷기

| 여행일자 : 2016년 00월 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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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씨고가(중요문화재 제27호)


교촌마을 내 최고의 여행지가 경주 최씨고가(중요문화재 제27)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경주교동법주(중요 무형문화재 제86-3) 건물이며, 최씨고가 입구에 유명한 교리김밥집이 자리잡고 있으며, 계림으로 향하는 길목에 경주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 경주 최씨고가.

▲ 측면에서 바라 본 최씨고가 전경

 경주 최씨 종가 '조선시대 최씨고택'

경북 경주시 교동 69

★★★★☆


조선시대 개인 건물로 최씨 종가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이 있던 자리는 요석궁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며, 전하는 말로는 1700년경에 건물을 조성했다 전하며, 197011월 대형화재로 인하여 사랑채와 별당이 사라졌다.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하였지만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년 1천석을 내주는 등 나눔을 실천하는 오늘날 기부문화의 선두주자 역활을 하였다.


최씨고가 자신을 지키는 지침 "육연"으로, 자처초연..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말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유자감연..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득의달연..성공했을 떄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실의에 빠졌을 떄는 태연히 행동하라.


담장 하나를 두고 나란히 있는 경주교동법주


▲ 최씨고가 담장에는 하나의 구멍이 뚫어져 있으며, 구멍으로 건너편 마루채가 조망된다.


교동법주는 경주 교동 최부자댁에 전해져 오는 비주로 조선숙종 당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최국선이 고향에 내려와 최초로 빚은 것으로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다. 술 빚기는 9월에서 다음애 4월까지로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 맛술로 참쌀밥을 사용하여 약 100일간 숙성한다.


▲ 교리 계란말이 김밥


경주향교


시도유형문화재 제191"경주향교"는 본래 신라 신문왕 2(682)에 창건한 국학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조선시대는 향교로 이어져 오면서 지방교육기관으로 구실을 해왔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재향을 받는 곳이며,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 서재는 강학을 하는 곳이다.


▲ 방문당일 외국인 결혼식이 있었다.

경주향교가 언제 지어졌는지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1492)에 성균관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것을 선조33(1604)에 동무, 서무를, 광해군 6(1614)에 명륜당과 동재, 서재를 중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씨 시조 탄생설화를 만날 수 있는 계림


김씨시조의 출생설화를 간직한 계림은 사적 제19호로 삼국유사에는 계림과 관련하여 탈해왕 4(60) 호공이 서쪽마을을 지나는데 시림이 온통 광명으로 가득 차 숲에 드리워지고 구름 속에서 황금으로 된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밝은 빛을 내며, 나무에는 흰닭 한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니 왕은 시림으로 달려가 궤를 열어 보았다. 궤 속에는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알지라 부르고 궁으로 데려와 태자로 책봉하였지만 훗날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신라 13대 왕으로 오른 미추왕이 알지에서 나온 김씨의 후손으로 최초 왕이되었다.


▲ 계림 숲


닭이 울었다하여 계림으로 불리는 곳은 본래 시림으로 신라의 신성림이였지만 알지가 태어났다하여 그 후로 계림으로 부르며, 지금은 100년이 넘는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 고목과 조선 순조 3년에 세운 비가 있다.


석빙고 & 반월성을 거쳐 안압지로 내려서다.


경주 월성은 사적 제16호로 신라시대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 또는 월성으로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을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 월성으로 안압지로 내려서는 길목


본래 이곳에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왕이 어렸을 떄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 후 파사왕 22(101)에 성을 쌓고 옮긴 후 부터 역대 왕이 월성에 살게 되었다 한다.

 

▲ 석빙고

옛 성터에 자리한 석빙고는 총 길이 18.8m, 홍예 높이 4.97m, 너비 5.94m로 조선시대에 만든 전천후 냉장고로 궁중의 음식물을 보관한 곳으로 추정된다. 석빙고는 현재위치에서 100m되는 지점에서 옮겨 온 것으로 1738년 만든 후 174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66호 석빙고는 약1000여 개의 돌이 사용되었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승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이라는 글을 볼때 영조 17(1741)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석비에는 경주 부윤 조명겸이 얼음 창고를 돌로 만들었다가 3년만에 이곳으로 옮겼다라고 적고 있는데 현재 석빙고는 서쪽으로약 100m 지점에서 옮겨 온 것으로 옛터가 있다.


동궁과 원지 '안압지 & 임해전지'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4(674) 궁성 안에 못과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키웠다는 기록은 곧 안압지를 두고 하는 말이며, 임해전전에 부속된 하나로 추정할 수 있다. 인공으로 조성된 3개의 섬과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호수 끝이 보이지 않도록 설계를 하는 등 세심한 설계를 통해 완공된 거대한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안압지 내 임해전의 위치는 알 수 없고 주변에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많은 초석이 외롭게 남아있는데 임해전에서 군신에게 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 안압지 전경


안압지는 동서 190m, 남북 190m로 정방형 평면으로 약 15,658평방미터로 4,738평에 이르며, 호안을 둘러싼 석축이 무려 1,285m로 안압지 내 물이 요동치면서 머물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많은 굴곡을 두고 그 안에는 방장도, 봉래도, 영주도 즉 삼신도를 옮겨 놓고 각 섬마다 가축을 풀어 사육하였다 한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3만점이 넘어 경주국립박물관에는 아예 안압지 전시관이 따로 두고 있다. 안압지에서 이처럼 많은 유물이 나온 것은 신라가 망할 무렵 부속품들이 연못 안으로 쓸려 들어갔거나, 전쟁 중에 빠진 것으로 말의 뼈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신라가 패망하던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안압지에서 주목하는 것은 목제품이 잘 출토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지역상 단점을 안압지 내 뻘이 바닥 층에 형성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대표적인 음주가무의 한 행위로 주사위가 나왔는데 "술 석 잔 한 번에 마시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등 당시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안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에 글자를 새긴 목간이 발견되는 등 다양한 부장품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197411월 박정희는 안압지 준설작업을 지시하고 1,300년 만에 대대적인 연못 청소를 하였는데 주목할 만한 물건이 나왔다. 뻘 속에서 나온 것은 목제품인 양물 즉 17.5cm 남근 모조품과 목간 배이다.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져 있는 나무배는 장정 몇몇이 올라타도 끄떡없는 나룻배 형식으로 건너편 섬에 가축의 먹이를 주기 위해 띄운 것인지 배를 타고 호수를 다녔는지 알 길은 없다.


첨성대를 지나다


첨성대는 높이 9.16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로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을 달고 사용된 돌은 17단으로 262개로 12단 까지 흙과 돌로 채우며, 19-20, 25, 26단에는 한문 우물정자형의 장대석을 설치하고 바깥으로 돌출시켜 판석을 설치하고 네모난 창틀에 사다리를 이용한 흔적이 있다. 창은 남쪽으로 북두칠성을 향하고 첨성이란 별을 우러러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 첨성대

첨성대로 알려진 이유는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첨성대와 선덕여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선덕여왕시절 돌을 다듬어 대를 쌓고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며 그 속이 트여 사람이 왕래하며 천문을 관측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아 첨성대를 두고 왕릉을 지키는 망루,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재단, 상직적 예술품, 탑 등으로 논란에 휩싸여 있다. 첨성대가 아니라는 주장에는 창문이 하나며 오르내리기가 불편한 점, 위쪽이 열려 있고 낮은 지대에 있다는 점 등이다.


서악지구 고분

▲ 서악지구 수 많은 고분군

 

서악지구 고분군은 경주 계림과 첨성대, 대릉원 사이에 위치한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분군이 모여 있는 지역을 두고 말한다.


대릉원을 여행하다.


경주 고분을 대표하는 대릉원은 미추왕릉, 황남대총, 천마총 등 촐 23기의 고분이 모여있는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사후 대릉에 장사 지냈다 하여 대릉원이라 한다.


▲ 대릉원 내 황남대총


대릉원은 1970년 복원을 통해 공원화 사업으로 아름다운 능선 사이로 고분산책로를 조성하고 잔디를 심었다. 주변 길을 따라 배롱나무와 소나무를 옮겨 심는 등 최대한 무덤의 능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조경하였으며, 2000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 5곳 가운데 하나로 등록되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발굴 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김종필 총리가 직접 방문하여 발굴을 독려했다. 당시 하루 인건비로 600원이였지만 발굴에 투입된 인원만 무려 1200명이였다. 발굴 중간단계에 금관을 막 들어 낼 무렵 맑은 하늘에서 뇌성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내려 인부들을 공포로 몰아가면서 김씨문중은 미추왕릉 옆을 훼손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결국 천마총만 공개하였다.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제외한 경주 사적지에 한하여 10월 한달간 무료입장 및 무료주차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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