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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동문-북문-금샘-고당봉 | 여행일자 : 201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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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0.6km-제1지점-0.7km-제3망루-1.1km-제4망루-0.9km-원효봉-0.7km-북문-0.8km-고당봉-3.7km-범어사 |
오늘 산행코스는 금정산성 동문까지 오른 후 동문에서 본격적인 산행길로 접어들어 제3망루-금정산성 성곽-제4망루-의상봉-원효봉-북문-북문습지-금샘-고당봉-미륵불-범어사 순으로 진행하기로 하엿다. ▲ 금정산성길 전경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으로 주봉인 고당봉(801.5m)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727m), 남으로 상계봉(638m)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동문에서 북문으로 향하는 길에는 독특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쌓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18,845m)길이 원효봉과 의상봉을 통과하며, 양산 방향으로 대륙봉과 파리봉 등 이름난 암봉이 곳곳에 있다. 금정산성 동문 동문에서 출발을 한다. 금정산 주능선이자 산성마을로 향하는 문이다. 지금이야 도로가 이어져 북문을 우회하여 차량이 마을로 들어서지만 금정산성이 온전하였을 무렵에는 동문을 거쳐 들어갔을 것이다. ▲ 동문 전경 동문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15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망이 아주 뛰어나고 동래읍성에서 가장 근접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의하면 순조7년(1807) 늣가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달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한다. 동문은 홍예석문(무지개 형태)으로 문폭은 300cm, 홍예의 높이는 340cm이다.’ 동래부사 정현덕(재임 1867-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하였다. 서문을 맡은 제자는 시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동문에서 제3망루로 향하다. 동문에서 북문까지 4.2km, 남문까지 2km,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 까지 5.2km 구간이다. 또한 이 구간은 부산이 자랑하는 갈맷길 제7-2구간(동문-고당봉-북문-범어사)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 산성길 동문에서 넓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동문 솔숲지역을 벗어나면 약간의 오르막길이 시작되면서 점점 고도를 높여 나간다. 오른쪽 산성부분은 현재 탐방금지 구역이며, 탐방금지 구역이 끝나는 지점 등산로를 벗어나 곧장 산성길로 접어들어 산성을 따라 걷다보면 제3망루에 도착한다.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여도 제3망루 이정표를 만나지만 등산로는 너무 밋밋하여 전망과 암석이 많은 산성을 따라 걷는 길을 택한다. 금정산성 제3망루 동문에서 북쪽으로 약 1km 정도 이동하면 제3망루에 도착한다.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다보면 자칫 놓치고 가기 쉬운 금정산성 제3망루는 아찔한 절벽 위 자리 잡고 있으며, 탁월한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외부에서는 전망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위길을 따라 내려서면 그제야 숨어있는 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전망대 주변에는 건물 기와 파편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 제3망루 전경 제3망루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금정산성 유명한 나비바위와 부채바위 주변의 천구만별(천 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의 모습을 한 바위와 어울려 드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찬탄을 자아낸다. 제3망루는 능선 동쪽으로 돌출되게 이어진 암반사이 경사면에 축대를 쌓고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식 망루를 설치하였다. 망루의 서쪽 10여 m 전방 바위면에는 번위돈 이라는 음각명이 새겨져 있어 돈대(성안 높직한 평지에 높게 축조한 포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제3망루에서 제4망루 제3망루를 지나 제4망루 입구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언덕길 같은 산성을 따라 걷다보면 억새와 철쭉이 이어진다. 특히 넓은 등산로를 벗어나 산성을 따라 걷는 허락된 길은 몹시 좁아 두 사람이 스쳐가려면 양보를 해 주어야 한다.
대자연이 만든 성곽 토르(Tor)는 영국 지방에서 유래 한 ‘똑 바로 서 있는 돌탑’이란 지방어로 금정산에는 다양한 암석이 흡사 탑을 쌓은 듯 풍화에 의해 형성되어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산성을 쌓은 대표적인 산성이다. ▲ 의상봉 전경 ▲ 나비문양 바위
금정산성에서 알려진 대부분의 바위를 조망하거나 스쳐가는 곳이다. 크고 작은 암봉부터 능선을 따라 자리한 다양한 이름을 가진 바위를 만나다 보면 힘든 줄 모르고 제4망루까지 오를 수 있다. 금정산성 제4망루 금정산성 망루 중에서 가장 넓은 공간 위 자리잡고 있다. 제4망루는 금정산성은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여 망루를 쌓았다. 산성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의상봉 같이 풍화작용으로 돌출산 토르(Tor . 똑바로 서 있는 돌탑)를 만나면 자연환경을 성벽의 일부로 포함시켜 놓았으며 제4망루가 바로 의상봉 아래 자락 능선길에 위치하고 있다. ▲ 제4망루 그리고 뒤로 의상봉이 보인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 또는 그보다 앞선 시기로 추정되는 옛 성으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수리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을 바탕으로 이미 1667년 이전에 성벽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숙종 29년(1703) 성벽을 보수하였다. ▲ 제3망루에서 바라 본 낙동강 방향 숙종 33년(1707) 성이 너무 넓어 관리가 힘들자 성 중앙을 남북으로 구분하고 성을 쌓았지만 영조 50년(1774)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폐지하고 순조 6년(1806) 성을 고쳤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파괴되어 성곽의 형체가 불분명해져 버렸고 그 후 1974년부터 동문과 서문, 남문, 북문을 차례로 복원하였다. 의상봉에 오르다 원효봉에서 산성길을 따라 내려선 후 또 다시 오르는 산성이 큰 바위를 만나 잠시 끊어지는 구간으로 의상봉은 620m 로 금정산성 제4 망루에서 바라보이는 언덕 위 바위산이다. ▲ 제4망루를 떠나면 곧장 만나는 의상봉.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 의상봉에 관해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의상봉은 금정산성 제4망루가 있는 위쪽의 봉우리로 동해의 망망대회를 한눈에 바라보는 망대의 역활을 할 수 있는 봉우리이다. 늠름하고 고고한 자태로 웅크린 호랑이가 동해를 바라보며 부산을 지키는 지혜로운 모습이다. ▲ 의상봉에서 원효봉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에서 바라 본 의상봉 의상봉 아래 무명암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여고 하는데 갑자기 산신령 호랑이가 나타나 승천을 저지하기 위해 한참 격렬한 몸싸움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승부가 되어 두 봉우리로 변해 위쪽에는 용을 저지하는 형상의 호봉이 되고 아래쪽에는 용을 닮은 용봉이 되었다. 이 두 봉우리를 합쳐 용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하여 오늘에도 부르고 있다. 원효봉에서 쉬어가다 북문에서 성벽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 따라 원효봉에 오른다. 탁틔인 전망과 함께 금정구를 배경으로 멀리 회동수원지까지 한눈에 조망된다. ▲ 의상봉에서 바라 본 원효봉. 원효봉으로 오르는 길은 등산로를 이용하여야 한다. 산성길 출입금지 구간 원효봉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먼저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아 ”으뜸의 새벽“ 원료봉(887m)이라 불렀다. 금정산성 제4망루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 망망대해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고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봉우리다.
김유신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 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래 서 있어, 선 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어느 낭도가 그 자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땅달보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 푸르름을 뽐내고 있어 사람들은 ”김유신 솔바위“ 라고 불렀다고 전해져오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 원효봉 오르막 구간 산성길 옆으로 나무계단이 이어지고 있다. ▲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만든 산성 금정산성은 사적 제 215호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높이 1.5~3m, 총면적은 약 8.2㎢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 원효봉에서 북문으로 내려서다 바라 본 정상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현종8)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금정산성 '북문' 고당봉에서 약 1km 내려서면 북문이다. 부산을 지키는 신령한 명산 금정산에 위치한 금정산성은 한때 국내 최고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겨우 복원된 성벽일부와 성문만 있다.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은 총 면적 830370.24㎡, 전체길이 17,337m로 현재는 4km만 남아 있다. ▲ 금정산성 북문 금정산 북문에 도착하면 주변 일대 습지지역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수영강(온천천)과 낙동강(대천천)으로 연결된 지류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지만 훼손되었고 오늘날 자연습지를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곳이다. 북문에서 금성동까지 3.2km, 범어사 1.7km, 동문 3.8km, 고당봉 1km 구간이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 또는 그보다 앞선 시기로 추정되는 옛 성으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수리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을 바탕으로 이미 1667년 이전에 성벽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숙종 29년(1703) 성벽을 보수하였다.
숙종 33년(1707) 성이 너무 넓어 관리가 힘들자 성 중앙을 남북으로 구분하고 성을 쌓았지만 영조 50년(1774)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폐지하고 순조 6년(1806) 성을 고쳤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파괴되어 성곽의 형체가 불분명해져 버렸고 그 후 1974년부터 동문과 서문, 남문, 북문을 차례로 복원하였다. 금정산 금정범어(金井梵魚) 금샘(나마. Gnamma) 정상인 고당봉을 앞두고 금샘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로부터 약 300m 지점이며, 숲길을 통과하여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과 합류하는 지점을 조금 내려서면 금샘을 조망할 수 있는 바위로 올라가는 밧줄이 기다리고 있다. ▲ 금샘에서 바라본 북문 방향 범어사를 찾는 사람이라면 금정범어(金井梵魚)라는 말을 한 두 번은 들었음직 할 정도로 이곳은 범어와 관련 그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범어란 금정산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고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고 둘레는 10여 척(3m)이며, 깊이가 7촌(21cm)쯤으로 물이 항상 고여 황금색을 이루며, 한 마리의 금빛물고기가 그 속에서 노니 금샘이라 산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의 고기라 하여 "범어"라 한 후 범어사를 만들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전하고 있다. ▲ 물이 얼어있는 모습 금샘에 도착한다. 멀리 북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산성길이 한눈에 조망되는 바위 앞에 큰 잉어가 입을 벌린 모습을 한 바위에 신비스럽게도 물이 고여 있다. 금샘과 범어사 설화를 옮겨보면 “ 금샘 설화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임을 알려주는 것과 함께 ‘금정산’이란 산 이름과 ‘범어사’의 절 이름, 그리고 이 사찰의 창건 내력을 알려주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자(3m) 남짓하며 깊이가 7치(21cm)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 금샘 전경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 고 하여 금빛나는 우물 곧 금정이란 산 이름과 법천의 고기 곧 범어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범어사 창건 사적과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는데 신라 의상대사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해에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이끌고 와서 신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대왕이 근심에 싸여 있는데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스님과 함께 금정산 금샘에 가서 칠일동안 밤낮으로 기도하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대왕이 의상스님과 함께 친히 금샘을 찾아가 기도를 하니 땅이 크게 진동하며 부처님과 천왕과 신중, 그리고 문수동자 등이 헌신하여 동해로 나가 왜적들을 격파했다. 대왕이 크게 기뻐하여 의상스님을 예공대사에 봉하고 금샘아래 호국사찰을 세웠으니 곧 범어사 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금샘(암상금정)에 관하여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당봉 동쪽에 자리 잡은 바위 무리의 동남단쪽에 화강암이 돌출해 있는데 그 꼭데기에 있는 절묘한 우물을 금샘이라 한다. 이 우물은 하트 모양으로, 바위의 절리(수직 균열) 방향과 같이 남북으로 긴 모양이다. 화강암 속에 있던 다른 암석이 화강암을 빠져나간 뒤 빗물의 작용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범어사에는 금샘에 물이 마르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을 면치 못한다라는 말이 전하고 있어 가뭄이 오면 금샘을 먼저 살펴보고 금샘 아래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금정산 고당봉에 오르다 고당봉(고당귀운)은 부산 금정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올해 벼락으로 인하여 새로운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으며, 구름이 감싸는 날이면 바닷속에 떠 있던 섬이 흰 파도가 몰아치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기상천외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고당봉에 흰 구름이 걸려 있을 때 마치 천상의 세상을 연상케 한다하여 ‘고당구운’이라 불렀다 한다. ▲ 금샘에서 바라 본 금정산 고당봉 정상 전경 고당봉 바로 아래 고모당이 있다. 고모당 전설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밀양 사람인 박 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절의 살림을 꾸려 가는데 신명을 바쳤다. 이 보살은 큰스님에게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명신을 모시는 산신각을 지어 고모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를 돕겠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큰스님은 그 유언대로 고당봉에 산신각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더니 과연 범어사가 아주 번창한 사찰이 됐다. 한때 젊은 스님들이 당제를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당집을 훼손했는데 그 뒤로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다시 고모당을 고쳐지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지만 고모당의 신성함과 영험함을 일러주는 전설이다. 고당봉(801.5m)은 금정산의 주봉으로 북문에서 언덕길을 따라 약 900m 거리이며, 범어사에서 오른쪽 산길을 따라 오르면 약 2.5km 거리로 산 정상아래 고모당이 있으며, 부산 앞바다와 낙동강이 한눈에 조망된다. 고당봉의 어원은 고려 때까지 모든 산신은 여신으로 금정산 역시 할미신이 존재하여 할미 고(姑), 집 당(堂)을 사용하여 고당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고당봉에서 만난 세마리 고양이 고당봉 정상에서 뜻밖에 고양이 세 마리를 만났다. 등산객을 전혀 피하지 않고 한가롭게 낮잠을 청하다가 옆으로 살살 오더니 온 몸으로 애교를 부린다. 그리고는 먹을 것을 달라는 듯 배낭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배낭을 열려고 하자 인근에서 낮잠 자던 두 마리까지 합세하여 얼런 달라는 듯 보챈다. ▲ 두마리는 어미로 보이며, 어미 색을 꼭 닮은 어린녀석 한마리가 함께 있다. 과자를 꺼내 고양이 앞에 펼쳐 보이려 하자 한 녀석이 앞발로 툭 쳐서 떨구더니 달려간다. 다른 두 마리도 합세하여 과자를 먹는듯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온다. 아.. 과자는 먹지 않는 구나. 다른 등산객이 배낭을 뒤져 햄을 꺼내들자 순식간에 그쪽으로 옮겨가 버린다.
고당봉 아쉬운 낙동강 낙조 낙동강 낙조가 제법 ‘S’자 물길을 연출한다. 순천만에서 만나는 대대포구의 낙조보다는 먼 거리에서 그려지는 모습이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조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낙조가 떨어질 때까지 머물러 볼까 한다. ▲ 낙조 전경 출발부터 시간에 많이 허락되지 않았던 등산이다. 12시에 출발하여 중간 중간 쉬었다 오다보니 내려갈 시간이 임박했다. 나를 태워 갈 차량을 범어사 아랫마을에서 오후 5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고 하산 시간을 고려하면 정상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 때 구름 사이를 비집고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낙조 모습... 기다려 줄 시간이 없다. 정상에서 장군봉 방향으로 잠시 이어지다 만난 가산리마애여러불 가산리마애여래입상은 행정구역상 경남 양산시 동면 금산리 산3-2번지로 1972년 2월 12일 시도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위치상 북위 35° 17′ 18.91″ 동경 129° 2′ 2.78″로 금정산 고당봉을 불과 300m 남겨 둔 북쪽 암릉지역으로 높이 12m, 폭 2.5m 마애불을 만나게 된다. ▲ 왼편 끝자락 바위에 마애불을 새겨 놓았다.
우리나라 암반이 많은 지역은 대형급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고창 선윤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1200호),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보물 제159호),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144호) 그리고 경주 남산에는 마애불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데 부산의 명산 금정산에서 비록 형체가 흐릿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다. 부산 금정산에서 만나는 마애불은 입체적 조각이 아닌 함안 방어산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과 같이 바위에 홈을 쪼아 새겼다. 가슴에 감실도 보이지 않는 매우 토속적인 형상으로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려 정확한 모습을 만나기 어렵지만 금정산 암릉지역 중 바위가 사방을 가리고 바람소리마저 잠재우는 바위골짝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적이다. 범어사로 내려서다 ▲ 청련암 ▲ 범어사 계곡 ▲ 범어사 계곡 ▲ 범어사를 빠져 나오다. 정확하게 얼마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공식적으로 동문에서 고당봉까지 5.2km 구간이며, 고당봉에서 장군봉 아래 길을 따라 내려서는 범어사까지 3.7km 구간으로 약 8.9KM 구간을 이동하였지만 등산로를 벗어나 산성길을 따라 걷거나 금샘을 다녀왔으며, 마애불을 다녀 온 것을 계산하면 적어도 10km는 족히 넘게 걸었던 것 같다. 범어사에서 범어사 지하철 구간까지 2.8km 구간이니 총 13km 구간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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