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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로 들어서는 길 바람이 소리를 내며 은행나무 가로수길 을 앞서 달린다. 한가롭던 산중 묵언 중이던 바람을 깨우며 마음속 고요를 흔든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신라 문무왕 16년(676) 축서사에 머물던 의상에게 왕명으로 사찰을 만들고 화엄의 대교를 설법하라는 명을 받고 만든 곳으로 국보는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벽화, 무량수전 앞 석등이 있고, 보물로 3층 석탑, 석조여래좌상, 당간지주가 있다. ▲ 부석사 전경 부석사로 진입하기 위해 일주문을 넘어서면 숲길이 곧장 사찰로 안내하고 제일 먼저 기적비와 당간지주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부석사 창건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보물 제256호인 당간지주를 지나 안으로 접어들면 삼층석탑 2기와 요사채가 자리 잡고 일직선상에 범종각이, 뒤편으로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있다.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삼층석탑과 동부도, 원흥국사비가 자리 잡고 부석, 삼성각, 주지실, 서부도가 왼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삼층석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자인당, 웅진전, 단하각, 조사당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신라 문무왕 16년(676)의상이 왕명으로 사찰을 만들고 화엄의 대교를 설법하던 곳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 자리 잡고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 현종7년(1016) 원융국사(圓融國師) 중창하고, 우왕 2년(1376)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중수한 후 1916년 무량수전은 전면 해체 수리 복원하였다. 부석사의 배흘림기둥은 다른 건물과 달리 배흘림을 강하게 표현하고 내진에 고주를 세웠다. 부석사로 진입하기 위해 일주문을 넘어서면 숲길이 곧장 사찰로 안내하고 제일 먼저 기적비와 당간지주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부석사 창건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보물 제256호인 당간지주는 부석사로 들어서는 숲길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화강석 소재의 당간지주로 높이가 4.25m이며 조각은 없지만 끝 부분의 각을 둥글 게 처리해 두고 앞 뒤 양 측면에 길 게 종선이 양각 처리되어 다소곳한 연인의 느낌을 주고 있는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불상은 높이 2.78m으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중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풍만한 얼굴윤곽을 통해 자상함이 넘쳐나고 손은 향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두툼하게 표현한 입술은 근엄하기도 한 소조불상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어 고려 초기불상으로 아미타불로 짐작된다.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부석사 삼층석탑 2기 부석사 당간지주를 보고 계속 안으로 접어들면 삼층석탑 2기와 요사채가 자리 잡고 일직선상에 범종각이 자리 잡고 그 뒤편으로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자리 잡고 있다. 계단식으로 언덕을 절묘하게 이용하여 만든 사찰의 주고 때문에 여행을 하려면 처음부터 하나씩 잘 살펴가면서 여행하여야 한다.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삼층석탑과 동부도, 원흥국사비가 자리 잡고 부석, 삼성각, 주지실, 서부도가 왼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삼층석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자인당, 웅진전, 단하각, 조사당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안양문(안양루)를 통과하다 처음의 부석사는 현존하는 기존 사찰과 부석사가 하나로 합쳐진 야릇한 사찰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그 이유로는 초기의 사찰형태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고 창건 후 사찰의 역사 또한 불분명한 가운데 무량수전이 그 중심에 있다. 지금의 부석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6년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으로 부르는가 하면 1967년 부석사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으로 옮기고, 1977년부터 1980년 까지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통해 일주문과 천황문, 숭당 등이 만들어 졌다. 흔히 부석사를 찾는 사람들은 무량수전의 배흘림에만 관심이 있다. ▲ 또다른 공간으로 들어서는 듯 부석사 안양루
의상이 신라로 돌아오자 왕은 부석사를 만들 것을 명하여 화엄을 전파할 곳을 찾던 중 태백산에서 머물 게 된다. 의상은 이미 다른 종파의 스님들이 절을 짓고 살고 있는 사찰을 찾아내고 그들을 설득하여 (전설에 의하면 선묘가 용이 되어 큰 바위를 공중 부양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그 법당 보다 조금 위쪽에 또 하나의 법당을 만들고 신라왕의 상을 벽화로 모셔놓았지만 후삼국에 이르러 궁예는 왕의 상에 크게 분노하며 칼로 내려쳤는데 고려시절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길목이자 대문 역할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아래서 올라오면 "안양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지만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보면 "안양루"라는 각자 다른 편액이 내걸려져 있다. 안양이란 극락을 상징함으로서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길목이 극락세계로 진입하는 길목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안양루를 오르기 전까지는 사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안양루에 오르면 소백산의 크고 작은 봉오리와 사찰이 한눈에 조망된다. 사람들은 안양루에 오르면 공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공포 뒤편으로 빛이 조화되어 5개의 부처상이 착시현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다 부석사의 대표적인 법당으로 무량수전을 찾게 된다.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계 건물로 천장은 연등을 조각해 놓고 소나무를 사용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왕명으로 의상이 창건, 조선 광해군 때 단청작업, 소조여해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모든 법당에서 만나는 불상의 배치와는 달리 무량수전의 부처는 남향이 아니라 동향으로 향하고 있다. ▲ 공민왕 친필이라는 무량수전 현판 무량수전(無量壽殿) 즉, 무량수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신 법당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은 수명이 한이 없는 부처 곧 아미타불 존칭어이며, 법당에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모신다. 특히 이곳 부석사 무량수전은 독특한 공간이자 인간이 오래 장수하고자 하는 염원이 가득한 곳으로 공민왕이 쓴 무량수전 현판이 내걸려 있다. ▲ 무량수전 뱊배흘림 기둥 개인적으로 무량수전이 부석사 중심건물인 대법당으로 보지 않는다. 이유는 대법당이라 여기기에는 건축미가 부처를 모시는 금당(金堂)의 화려함과는 전혀 멀다는 것과 부처가 앉은 방향 때문이다. 대부분 사찰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보편적 부처와는 달리 동쪽으로 향하는 이유를 제각각 설명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건축미가 전해주듯 불교의 이념을 강의하던 강당(講堂)으로 많은 사람들이 앉기 편리하도록 공간배치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건축물은 다른 법당과는 달리 정문을 제외하고는 측면 문이 없으며, 외부 벽화도 없다는 점이 금당일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나만의 추정이다. 최근 주변에서 수습된 고려시대 강당(講堂)명 기와가 어쩌면 열쇠가 될수도 있을 듯 하다. 뿐만 아니라 강당의 기본적인 부속 건물로 조선 후기까지 취원루와 응향각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여기까지만 의심을 해본다면 사찰 내 서원성격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건축사적에 의하면 무량수전 아래 법당이 한 채 더 존재하였다 하니 이곳이 금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 무량수전 아미타불 천왕문을 시작으로 대석단을 거쳐 범종루까지 일직선상에 놓여 있던 진입로가 왜 하필이면 안양루에서 심하게 꺽여 틀어진 후 무량수전으로 오를까? 대자연에 각자의 방식으로 가람의 배치도를 완성한다 하지만 부석사의 경우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사찰에 관해 무량수전이 강당이었다면 안양문 밑에 금당이 존재해야 하며, 지금 그 공간이 어디 있느냐는 것 또한 의문이다. 만약 금당이라면 부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창문이라도 내는 것이 당연할 것이지만 어딜봐도 측면은 쪽창문도 없다.
무량수전 부처는 수량수불인 아미타불로 원융국사 결응(決凝, 964~1053)의 ‘원융국사비문’에서는 의상이 귀국 후 창건한 사찰로 본당인 무량수전에 아미타불 한분만 봉안하고 협시불을 두지 않았다 한다. 고려시대 승려 원융국사는 1041년 들어와 1053년 부석사에서 입적한 분으로 부석사에는 화엄에 기반하여 탑도 세우지 않았다 기록하고 있어 무량수전은 아미타불로 거의 확정적이지만 아미타불의 모습이 전혀 다르는 점이다. 이에 대해 만약의 가설이 하나 따를 수 있다. 무량수전 아래 건물이 하나 있었다는 것이었고 오늘날 그 건물은 없다. 만약 그 건물이 중심전각 무량수전이었고 오늘날 무량수전이 강당이었다면? 그리고 대웅전이 어떤 이유로 사라지고 강당 건물에 무량수전 현판이 옮겨져 왔다면 하는 의구심이다.
무량수전 아미타여래불이 동쪽으로 향한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다만 높은 고승의 인지도 만큼 그에 관하여 다양한 설이 난무하고 있다. 고려시대 무기(無寄)의 석가여래행적송에는 의상대사가 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고 이 때문에 의상이 서쪽을 보고 수행하도록 불상을 동향에 두었다는 설도 있는데 만약 그 이유라면 의상이 창건한 많은 사찰에서 불상을 동향을 향하도록 배치하였을 것이 아닌가 싶다. 사찰 역시 전체의 주축도 17˚정도 꺾이다 있다. 부석사의 기둥은 다른 건물과 달리 배흘림을 강하게 표현하고 내진에 고주를 세웠다. 무량수전에 봉안된 소조불상은 높이 2.78m으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중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풍만한 얼굴윤곽을 통해 자상함이 넘쳐나고 손은 향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두툼하게 표현한 입술은 근엄하기도 한 소조불상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어 고려 초기불상으로 아미타불로 짐작된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하고 있는 곳으로 경북 안동 봉정사 극락전, 전남 강진 무위사 극락전, 충남 부여 무량사 극락전이 있지만 유독 부석사만 무량수전이다.(아미타불을 주불을 모시는 곳을 아미타전, 극락전, 무량수전이라 부른다) 부석사가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창건하고 아미타불을 모셨지만 문무왕 18년(678)에 만든 범어사는 석가여래를 모셨다. 이보다 앞선 낙산사, 회룡사는 관음보살을 모셨고 신문왕 2년(682) 봉정사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셨다. 명쾌하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무량수전으로 알려져 있고 원융국사사탑 비문에 보조하는 부처가 없는 아미타불을 모셨다는 기록들이 무량수전을 뒷받침하지만 불상 뒤편 당초문과 화염문이 조각된 광배에 3구와 4구씩의 화불을 부착했던 흔적이 있어 과연 단일불상이 존재하였는지 의문은 끝이 없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의상이 찾았을 당시 거주하던 사찰은 어쩌면 당시 지배적인 민초의 정토신앙을 모신 사찰과 의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화엄사상이 공존하다 세월이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화엄사상으로 흡수되고 정토사상의 법당은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주 법당은 이미 사라지고 무량수전만이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모든 부분은 가설일 뿐이다. 증명이 된 것이라곤 단 한 줄도 없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 ▲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국보 제17호. 높이 297cm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는 탑이 없는 대신 광명을 밝히는 석등이 자리 잡고 있다. 좁은 공간 배치에 답답함을 느껴지는 석등은 화강암의 8각 형태로 총 2.97m의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석등은 사각석 지복석 위 같은 사각형 지내석을 올리고 측면 1면에 2개씩 안상을 새기고 4면에는 연대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양각해 놓은 국보 제17호이다. 통일신라 이후 제작된 석탑은 매우 세부 조각이 복잡하고 화려한 장점이 있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5호), 화엄사 석등(국보 12호), 보림사 석등(국보 44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103호)등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며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15호), 실상사 석등(보물 35호), 실상사 백장암 석등(보물 40호)등이 있다. 부석사 석등을 100번만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과 함께 석등 네모 창을 통해 무량수전의 간판이 들어오며, 땅에 숨었다는 석룡의 꼬리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 안양루 그리고 석등 무량수전은 어떤 전각인가. 한마디로 서쪽의 서방정토에 계시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남향이고 협소한 공간을 활용함에 있어 중생이 서쪽을 향해 경배할 수 있도록 아미타불을 서쪽에 등을 두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모셨을 가능성이 있다. 범종각을 지나 오르면서 안양문(극락이란 표현이다)이란 현판을 만날 수 있지만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안양루라고 새겨져 있는 현판을 만날 수 있다. 본존불을 모신 앞 정각이 "루"가 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의 크고 작은 봉오리를 한눈에 조망하기는 이보다 좋은 위치가 없기도 하니 "루"가 있을 법도 하다. 사람들은 부석사의 가람배치가 1단계 구조를 가진 기승전결 구도로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의 공간을 기(起)라고 하면 대 석단 위 범종각까지는 승(承), 범종각과 안양문까지의 마당이 전(轉)의 공간이 되고,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끝점, 즉 결(結)로 풀이하지만 아쉽게도 건물의 배치도는 처음 만들 당시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지금의 일주문은 1977년 현 천왕문 자리가 일주문 자리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일부 전각의 위치가 변경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쉽게 이 부분을 수긍하기 힘들며, 당간지주의 위치가 어중간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다. 지금 사찰의 구조라면 당간지주가 그곳에 있다는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부석사 무량수전 ▲ 부석사 무량수전 측면 전경 국보 제18호인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을 올린 주심포계 건물로 신라 문무왕 16년(676)왕명에 의하여 의상이 창건하고 조선 광해군 때 단청을 하였으며,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부처는 남향이 아니라 동향으로 향하여 있다. ▲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 오른편 언덕 위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유형하던 2층기단 위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높이가 5.26m이다. 의상과 선묘 이야기 선묘각에는 부석사를 만들 때 의상을 도와준 선묘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전설 만큼에 불과한 선묘가 실지 부석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선묘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비록 큰 규모의 전각은 아니지만 사찰내 묘령의 여인 영정이 걸려 있다는 그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기 때문이다. 영정은 1975년 모시고 있다. ▲ 무량수전 뒷면에 자리하고 있는 선묘각 선묘각에는 부석사를 만들 때 의상을 도와준 선묘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전설 만큼에 불과한 선묘가 실지 부석사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선묘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비록 큰 규모의 전각은 아니지만 사찰 내 묘령의 여인 영정이 걸려 있다는 그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기 때문이다. 영정은 1975년 모시고 있다. 녹색 단청이 돋보이는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과 선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의상이 중국으로 불경을 배우기 위해 여행하던 699년 중국 동주에서 머물렀다. 그동안 먼 길을 여행한터라 의상은 병을 얻었고 치료하는 과정에 선묘라는 여인은 의상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밤낮으로 의상을 정성껏 보살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는가. 선묘의 간호덕분에 의상은 며칠이 지나 말끔하게 병을 털고 일어나게 되었지만 선묘의 가슴앓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했다. 의상은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물면서 아침마다 탁발하는 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의상을 흠모하는 선묘였다. 선묘는 더 이상 참기 힘들어 의상에게 마음을 전하기로 하고 탁발을 하고 나오는 의상 앞을 선묘가 나서 길을 막고는 그동안의 속마음을 원효에게 말했다. ▲ 선묘각 내 선묘 영정 원효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자신의 신분이 승려로서 부처님께 귀의 한 터라 선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불교의 교리를 따라 제자로 삼을 수 있다 고하자 선묘도 의상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던 어느 날 의상이 집을 떠나 가까운 절로 들어가게 되자 선묘는 의상이 떠나기 전날 한 가지 부탁을 하게 된다. 선묘의 부탁은 집을 나선 후 의상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신라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들러 달라는 것이었다. 의상은 선묘의 청을 받아들이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떠나 지엄대사의 제자로 들어간 후 10년간 불경을 공부하고 신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선돌을 공중에 부양하고 있는 그림 의상이 신라로 가는 길목에서 문뜩 선묘의 부탁이 머릿속을 스쳐가자 신라로 가는 배를 타기 전 선묘의 집을 들리기로 하고 서둘러 갔는데 하필이면 선묘가 그날 집에 없었다. 의상은 곧 배가 떠날 것이고 배가 떠나는 시간이 촉박하도록 선묘가 오지 않자 할 수 없이 배를 탔다. 뒤늦게 집으로 온 선묘는 의상이 다녀갔음을 알고는 그동안 의상을 생각하면서 만든 옷을 들고 항구로 달려갔다. 선묘가 도착하였을 때 배는 이미 항구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선묘는 자신의 마음은 비록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옷이라도 받아 달라면서 바다로 던졌는데 순간 바람이 불어 옷이 바다에 떨어지지 않고 의상의 품에 안겼다. ▲ 부석사 부석 의상이 떠나자 선묘는 의상을 사모함에 결국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용이 되길 바랬다. 신라까지 가는 그 먼 길을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용으로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신라도 돌아온 의상이 어느 날 중국에서 온 상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선묘낭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의상이 떠난 후 용이 되어 바닷길을 지켜주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전해들은 의상은 가슴이 아팠다.
의상은 지엄대사의 뜻을 받들어 낙산사를 세우고 태백산 근처에 새로운 절을 세우려 하였지만 그곳에는 이미 다른 종파의 스님들이 절을 짓고 살고 있어 참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상은 마음속으로 꼭 그 자리에 절을 세우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부처님께 빌었고 용이된 선묘는 의상이 어려움에 처하자 용의 모습을 3일간 드러내면서 큰 돌을 공중에서 세 번이나 올렸다 내렸다 하니 다른 종파의 스님들은 놀라서 그 절을 떠나게 되었다. 의상이 절을 안전하게 짓자 용이된 선묘는 석룡이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었는데 지면에서 무려 2척의 깊이 속에 48척의 크기로 머리를 무량수전 주불 밑에 두고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까지 이어진다고 하며, 공중에 떠 올렸던 바위는 절 옆에 내려앉았는데 그 바위를 부석이라고 하고, 선묘의 도움으로 만든 절이라 하여 부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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