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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이 새가되어 날아들었다는 대조사는 입구에 동종을 세워놓고 정면에 대웅전을 그리고 뒤편으로 자연석에 새긴 큰 불상과 전각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든 건물, 스님이 거처하는 요사채 한 칸이 절집 전부이다. 그리고 방문한 당일 하필이면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이 오랜세월의 흔적을 지워내는 작업 중이었다. ▲ 대조사 전경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성왕 5년(527)에 백제 불교중흥에 앞장선 겸익이 세운 것으로 고려 원종 때 장로인 진전에 의해 중창되었다. 대조사는 스님 한분이 큰 바위 아래서 수도를 하는데 관음조 한 마리가 바위에 앉는 꿈을 꾸고 나니 그곳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 대조사라 하였다.
관음조 한 마리 날아와 미륵보살상이 되니 불교유적으로 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 대조사석탑(충남 문화재자료 제90호) 및 성흥산성(사적 제4호)등이 있다.
대조사가 자리한 산 정상에는 금강 하류가 한 눈에 조망되고 백제 동성왕 23년(501) 위사좌평 백가가 가림성(성흥산성)을 쌓고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켰다 한다. 성을 축성했던 백가는 높은 관직인 위사좌평임에도 성을 한낮 성을 지키는 수장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한 후 난을 일으키지만 무령왕이 즉위하면서 난이 평정되고 백가는 처형당했다고 한다. 대조사 석탑(문화재 자료 제90호) 사찰 경내를 지키고 있는 대조사 석탑은 고려 초기 작품으로 1975년 지붕돌만 남아있는 석탑을 인근에서 복원한 것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 이후의 양식을 반영한 탑으로 문화재 자료 제90호로 지정되어져 있다. ▲ 대조사 삼층석탑(문화재 자료 제90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석불과 같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원래 지붕돌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부근에서 몸체돌을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이 지방에 있는 다른 탑과 달리 통일신라 이후 유행한 3층 석탑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형태로 보아도 신라탑 양식을 띄고 있다.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던 장소로 예배대상이었으나 후에 금당 불상의 비중이 커지면서 절의 중요한 상징적인 시설물이 되었다. 이 절은 관음보살이 새가 되어 날아와 앉은 자리에 세웠다고 해서 대조사라 부른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보물 제217 바위를 깎아내고 그곳에 부처를 모셨다. 정면을 향한 눈빛은 예사롭지 않고 머리에 올려 쓴 보관은 흡사 논산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빼다 박았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거대한 조각불상인 미륵불은 논산관촉사 은진미륵에 비하여 얼굴이 세부적으로 윤곽을 묘사하고 보관의 높이도 낮아졌으며, 가사를 오른손에 길 게 늘어뜨린 점이 차이가 있다. 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표현을 위해 구멍을 뚫고 그 사이로 철선을 넣어 연꽃이 고정되도록 하였는데 무엇보다 얼굴에서 느끼는 모습은 은진미륵 과 크게 다르다. 작은 입술과 낮은 코, 작은 눈 등에서 전체적인 비례대비감은 떨어진다. ▲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방문 당일 보수기간이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0m로 고려시대 시대적 반영이 잘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전쟁격동기에 불심을 통해 안정감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거대한 불상조각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이곳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 보수작업으로 인해 오래전 방문하였을 당시 담은 모습 석불 앞쪽에는 배례석을 흡사 고인돌처럼 만들어 두고 앞면을 평탄화 시켜서 쉽게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해 두었으며, 옆면 바위에는 여러 사람의 흔적인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중 특이하게도 부도군을 표시해둔 것도 있다. 부여 박물관에서 만나 본 손가락 크기의 금불상과 지역 산속에서 만나는 대불은 비교가 된다. 경주의 경우는 실물크기에 가깝지만 이곳은 유독 큰 대불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거대한 미륵불이다. 크기에 비해 세부묘사가 없으며, 조각 기법이 세련되지 않은 점과 신체의 비례가 어울리지 않는 점 등이 관촉사 미륵보살상과 비슷하다. 특히 충남 지방 일원에 이같이 거대한 양식을 가진 석불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은 이 지방에 유행한 미륵신앙에서 연유한 듯하다.’ 가림성 늙은 고목을 찾아 나서다 부여 가림성 대조사 뒤편 산길 임도를 따라 조금 오르면 도로 끝자락 부여 가림성 입구에 도착한다. 가림성은 사적 제4호이며, 특히 성 내 한그루의 고목나무가 영상속에 자주 등장하면서 일몰과 함께 사진을 담고자하는 사람이 어둠과 함께 찾아 드는 곳이다. ▲ 부여 가림성 전경 부여 가림성 안내글은 다음과 같다. ‘부여 가림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가림성 늙은 고목나무 어둠이 찾아들고
가림성 늙은 고목나무는 늙어도 위세는 대단하다. 전국에서 사진을 좀 찍어봤다고 하는 사람이면 어김없이 방문 할 정도로 늙어도 곱게 늙은 나무 한 그루로 인하여 이곳에는 옛 백제의 석성보다 늙은 고목나무가 더 인기를 누린다. 해가 숨어든다. 각자 나름 실력을 뽐내는 시간이다. 나무 가지가 하트 모양이라며 꺾어진 가지를 가리킨다. 어제보다 오늘 낙조가 좋지 않아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며 날짜를 잘못 잡아 왔다는 투정부터 카메라 장비자랑까지 어둠이 석성을 삼켜 버릴 때까지 입담만 늘어갔던 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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