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이전 여행지/사찰 트레킹

3사찰트레킹 - 충남 보령 성주산 성주사지

허영꺼멍 2017. 8. 7. 10:17

.



9산 선문 중 한 곳-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산 성주사지"

⊙  2017.08.03 ⊙




죽은 영혼이 개망초 꽃이 되어 황량한 터에 꽃 피웠을까? 40번 국도를 따라 진행하다 성주초등학교를 지나 성주사지 주차장에서 주차를 한 후 성주사지로 향한다. 더운 여름에는 옛 사지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피하라는 말이 있는데 성주사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무 한그루 없어 그늘 한 점 찾기 힘든 성주사지는 특히 보행로가 따로 없어 풀숲을 걷는 기분에 불편하기만 했다. 더운 여름 진드기가 활동하기 딱 좋은데...


▲ 성주사지 전경



▲ 샛노란 가을 280-175-220

여행별점 : ★★★★☆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성주사'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104


통일신라시대 낭혜화상이 다시 세운 선종 사찰 성주사는 오늘날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몇몇 불교유적을 넓은 공간에 남겨 두었다. 백제법왕 때 오합사로 시작한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선문구산 중 하나로 자리메김했다. 또한 성주사는 1금당 1탑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현재 확인된 사찰 영역이 무려 8,800여평이다.


1. 낭해화상탑비 2. 오층석탑 3. 중앙 삼층석탑 4. 서 삼층석탑 5. 동 삼층석탑 6. 석등 7. 석계단 8. 석불입상 9. 금당지 10. 삼천불전지 11. 강당지 12. 서남회랑지 13, 중문지 14. 동남회랑지 15. 광장 16. 잔디광장 17. 관리소


성주사지는 사적 제307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성주사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성주시는 백제 시대에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로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호국 사찰이었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통일 신라 시대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엄대사(801-888)가 머무르면서 (847~) 다시 크게 일으켰고 신라 문성왕이 성주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 석등과 삼층석탑 그 뒷편으로 금당터 그리고 석탑 3기와 낭혜화상탑비가 조망된다.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한다. 이 전국 9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9산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대사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 금당터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이후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발굴 조사 결과 중문-석등-5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1가람 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왼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이 터에는 국보 제8호인 내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를 비롯하여 통일 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1개의 5층 석탑과 3개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성주사지 석등

충남 유형문화제 제33호


▲ 석등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 신라 말기에 세운 석등이다. 지붕돌에 비래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졌으며, 팔각형 지붕돌 위의 상륜부가 파손되었다. 높이는 220cml고 재료는 화강암이며,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하였다.’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19호


▲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화강암으로 된 이 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2중 기단 위에 세운 5층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옥개석.탑신석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1층 몸돌에 사리공이 있으며 기단부와 1층 몸돌 사이에 괴임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 석탑 양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것인데, 이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5층 석탑이 올려져 있다. 이는 이곳이 옛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백제 탑과 신라 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거나, 이 시기에 나타난 다양한 탑 양식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한다. 현재는 상륜부가 없어진 상태이다.’





성주사지 석계단

충남 문화재 자료 제140호



옛 석계단과 그 색이 완연하게 다른데 통일신라 당시 만들어진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으로 양쪽에 사자상을 조각하였는데 1986년 도난을 당한 후 옛 사진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사자의 목에 큰 방울이 매우 독특하다.



성주사지 새개의 삼층석탑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되는 3기의 탑이 금당지 뒷편 일렬로 전시하 듯 모여 있다.



보령 성주사지 서삼층석탑

보물 제47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중 기단 위에 만들어진 3층석탑으로 면석과 탑신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3층석탑양식을 띠고 있다.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443cm이다.’


▲ 성주사지 서삼층석탑

이 탑은 지붕돌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불교 행사 때 금동판이나 기타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상륜부가 없어졌다. 이 탑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가섭.약사여래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보령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보물 제20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가운데에 있는 탑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여고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2층 기단을 가진 거대한 3층 석탑을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3층 석탑의 규모가 작아진다.’


▲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이 석탑은 규모만 축소되엇을 뿐 형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료는 반려암이며, 높이가 410cm이고, 상륜부가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특징이다.’


보령 성주사지 동삼층석탑

충남 유형문화재 제25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2중 기단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과 몸돌에는 우주와 탱주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3층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 성주사지 동삼층석탑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이 탑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가섭.약사여래사리탑 중의 하나이며 발굴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성주사지 석불입상

충남 문화재 자료 제373호


▲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석불입상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의 얼굴 모양은 타원형인데 심하게 풍화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다. 왼쪽 귀는 없어지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해 전체적인 인상이 일그러졌다.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이며 손은 없어졌다. 입고 있는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었으며, 어깨에서 배까지는 유(U)자 모양의 무늬를, 양팔 등에는 계단식 무늬를 표현하고 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 사이에 권위적은 모습을 모두 배재하고 친밀감을 느끼게 만느는 민불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소박한 모습을 한 불상이다.’



보령 성주사지 낭햬화상탑비

국보 제8호

지대석 일부와 거북 얼굴 부분이 손상을 입엇을 뿐 신기하게도 비신과 머리돌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본래의 모습이다. 낭혜화상은 태종무열왕의 8대 손으로 성은 김 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며, 낭혜는 사후에 나라에서 내린 시호이다.


▲ 보호각 속에 있는 낭혜화상탑비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 말기 성주사에 머무르면서 선문9산 중 성주산문을 이르킨 무염대사(801-888)를 기리기 위하여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지은 비석으로, 10세기 초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5,120여 자의 긴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의 화려한 문장을 최인연이 해서체로 쓴 것이다. 내용은 무염대사의 성장과 출가, 중국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 구기국하여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종사와 당시의 신분제도 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남포오석이 재료인 이 비석은 1천여 년의 풍상을 견디며 고스란히 남아 있어 남포오석의 뛰어난 품질을 보여준다. 이 비는 최치원의 면문장과 완벽한 보존 상태, 뛰어난 조각술 그리고 웅장한 크기 등이 어우러져 통일신라 말기의 우리나라 고승 탑비들 중에서 최고의 비로 인정받고 있다.’


게시물은 복사, 편집을 할 수 없습니다. 본 글은 저작권 및 무단 복사,  이동을 할 경우 법적조치와 함께 강력대응합니다.

영업 댓글 및 비방 댓글은 허락없이 삭재합니다.       


여행이야기에 공감하시면 '공감'을 '클릭'해 주십시요

http://blog.daum.net/okgol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