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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방문을 하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김천 직지사로 향한다. 한 여름 시원한 계곡도 좋지만 전국에서 몰려드는 인파로부터 피하고픈 청개구리 다운 발상 전환으로 국내 사찰 중에서 그동안 한번 다녀왔지만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사찰을 재방문하며 여름을 날려 보고자 그 첫 번째 여행이 김천 직지사였다. ▲ 김천 직지사 내 박물관 전시중인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 보물 제1854호
직지사 불교유적으로는 대웅전(보물 제1576호), 대웅전삼존불탱화(보물 제670호),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 앞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비로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7호), 청풍료 앞 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이 있다. ▲ 직지사 안내도 안내는 다음과 같다. 1. 일주문 2. 대양문 3. 고경당(종무소) 4. 응향각 5. 반야정사 6. 금강문 7. 천왕문 8. 화장실 9. 만세루 10. 범종각 11. 육화당 12. 심검당 13. 감은전 14. 성좌각 15. 대웅전 16. 향적전 17. 관음전 18. 벽안당 19. 사명각 20. 응진전 21. 명부전 22. 청풍로 23. 황악루 24. 약사전 25. 비로전 26. 명월당 27. 삼성각 28. 천불암 29. 청류당 30. 천불선원 31. 극락전 32. 서별당 33. 당일전 34. 산중다원 35. 설법전 등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는 눌지왕 2년(418) 아도 화상이 소백산맥 준령 황악산 길지로 전해지는 곳에 도리사와 함께 세운 후 동국제일가람으로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을 이르는 직지사라 불렀다. 다른 일설에는 도리사를 만든 후 황악산 길상지지 형국이 있다하여 직지사로 불렀다는 설과 고려 능여 화상이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축지하였기 때문이란 설 등이 있다. ▲ 직지사 대웅전 그리고 대웅전(보물 제1578호) 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직지사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천년의 역사와 세월을 가직한 황악산 직지사.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선현의 지혜와 자비를 심어온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2년(418) 이도화상이 창건하였다. 직지 라는 명칭은 직지인심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례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율사가 중수하였으며 경순왕 4년(930) 천묵대사가 2차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태조 19년(936) 능여조사가 중창하여 큰스님들을 많이 배출하고 동국제일가람이라 일컬었다. 조선 정종 원년(1399) 중건이 있었고, 성종 19년(1488)에 학조대사가 중수하여 조선 8대 사찰 가운데 하나로 사세를 크게 흥성시켰다. 이곳은 많은 국사, 왕사가 수도 정진하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벽계 정심선사가 조선조의 법난 때 이 곳에 첩거하여 한국 선종의 대맥을 이었다. 선조 29년(1516) 왜적의 방화로 모든 전각, 당우가 소실 된 것을 선조 35냔(1602)부터 중창하기 시작하여 약 60년 만인 현종 3년(1662)에야 환전히 복구하였다. 근세에 들어서는 고종 년간에 일부 중수가 있었으며, 1963년부터 30여년간에 걸쳐 현재의 전각과 당우를 중창. 중수하였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보물 제1578호
직지사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으며, 대웅전 정면 창이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 보기드문 대웅전 정면 창호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에는 대웅대광명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선조 35년(1602)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이후 인조 27년(1649)에 중영이 있었고, 영조 11년(1735)애 다시 중창하였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지붕형식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직지사 중심 법당답게 크고 짜임새가 있으며, 높은 천장에 화려하면서 절재된 장식은 종교적인 장엄함을 더한다. 세 분의 부처님이 앉아 계신 수미단은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용, 물고기, 개구리, 연꽃 등 여러 무늬들을 소박하게 조각하였다. 폭이 9m에 이르는 후불벽 뒤에는 활달한 필치로 관세음보살을 그렸으며, 다른 벽면도 화려한 벽화들로 장식하였다.‘ 직지사 대웅전앞삼층석탑 보물 제606호 ▲ 대웅전 앞 2기의 석탑 문경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석탑으로 1층 기단 위 3층 탑신을 올려놓았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몸돌 모서리에 우주를 새겨놓고 상륜부는 유실된 것을 1970년 옮겨 오면서 복원한 높이 9m 의 통일신라시대 탑이다. 직지사 대웅전삼존불탱화 보물 제670호 비단바탕에 채색된 후불탱화로 조선 후기 대웅전이나 대광명전에 봉안하는 특징을 따른 형식으로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와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이 아미타불 극락회도이다. 탱화는 영조 20년(1744) 세관, 신각, 밀기 등 10여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대웅전 내 삼존불탱화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쭉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불상 뒷벽에는 가 부처들의 설법 장면을 그린 석가모니후불탱, 약사후불탱, 아미타후불탱 등 3폭의 불화가 걸려 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불화들은 모두 길이 6m가 넘는 거작으로, 영조 20년(1744)에 직지사의 세관스님을 비롯한 16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이다. 각 폭마다 여래를 중심으로 보살.나한.천왕.신장 등을 배치하였고, 채색은 적색.녹색.황색을 주조색으로 설채하였다. 짜임새 있는 구도, 각 존상 표현에 보이는 뛰어난 묘사력, 차분한 색조와 조화로운 배색, 화려하고 섬세한 세부 표현 등이 어우러져 장엄한 불교회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직지사 삼존불탱화는 작품성과 규모에 있어 조선 후기 불화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비로전앞삼층석탑(문경도천사지삼층석탑) 보물 제607호 비로전앞삼층석탑 또는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으로 불린다.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석탑으로 1층 기단 위 3층 탑신을 올려놓았다. 1974년 옮겨와 비로전 앞에 있는 석탑으로 함께 가져온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이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과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옛 절터에 있던 3기의 석탑 중 하나이다. 1974년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75년 상륜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직지사청풍로앞 삼층석탑 보물 제1186호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또는 직지사 청풍포 앞 삼층석탑으로 불린다. 강락사지에 있던 탑을 1968년 선산군청 앞뜰에 복원하였다가 1980년 옮겨온 탑으로 1단의 기단부 위 3층 탑신을 올린 높이 9m 의 통일신라시대 탑이다. ▲ 직지사 박물관 뒷편 옮겨져 있는 삼층석탑 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원해 구미시 선산읍 원동 낙동강변 강락사터로 전해지는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이다.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로 옮겼다가 1980년 다시 이곳으로 옮겼으며, 이때 상륜부를 추정 복원하였다.’ 박물관 내 전시된 불교유적 ▲ 직지사 석조약사애래좌상(보물 제319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정수리 뒤로 솟아난 옥계가 유난히 큼직한 이 불상은 머리의 크기에 비해 어깨와 무릎 폭이 작으며, 특히 상호 부분이 많이 깨어져나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왼손에 받쳐든 둥그런 약합을 통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뒷면의 배 모양으로 생긴 광배는 이른바 주형거신광인데, 불상과 한 돌로 조각된 점이 색다르다. 9세기 무렵, 통일신라 후기에 이 불상과 같이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왼손에 약합을 든 약사애래좌상이 많이 만들어진다.’ ▲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국보 제208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사리함은 1977년 구미 도리사의 석종형 사리탑에서 발견되었다. 육각을 기본으로 하여 여닫을 수 있는 두껑 구실을 하는 육도지붕 모양의 옥개, 여섯 면에 정교한 무늬가 들어 있는 탑신, 면마다 안상이 투각된 좌대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는 17cm, 밑면의 지름은 9.8cm이다. 지붕 모서리마다 귀꽃이 앙중맞게 솟았는데, 그 그 목에는 작은 고리가 하나씩 감겨 있고 처마에도 면마다 고리가 하나씩 달려 열두 개의 고리에 무언가 장식물이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묘법연화경 권제1-3, 4-7(보물 제1306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묘법연화경은 계환이 1126년에 저술한 묘법연화경요해로 1405년(태종 5) 안심사에서 개찬하여 후쇄란 것이다. 이 책은 1-3권을 묶은 1책과 4-7권을 묶은 1책으로 된 7권 2책의 완질본이다.’ ▲ 구미 수다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638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웅전에 봉안하였던 후불탱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하는 영산회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연화대좌 위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여덟 분의 보살이 부처님을 에워싸듯 시립하고 있다. ▲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보물 제1854호)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김천 고방사 아미타여래설법도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현존하는 소선시대 불화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채색이 박락된 부분을 1960년경에 새로 칠하면서 고색은 많이 상실하였으나 짜임새 있는 구도와 엄정한 존상의 모습, 차분한 색조 등이 여전히 이 탱화의 격을 지키고 있다.’ 직지사를 돌아 나오다
아도 화상이 직지사를 개창 후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 법사가 중수하고 경순왕 4년(830) 천묵 대사가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 정종 원년(1339)에는 정종의 어태를 절의 북봉에 봉안하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대사가 출가하여 신묵 대사의 제자가 되면서 조선 8대가람으로 사세를 확장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당시 사찰령에 의해 해인사 말사로 전락하였다가 광복 후 사세를 회복하여 지금은 국내 25본산 중 제8교구 본사로 자리 잡고 있다. ▲ 직지사 계곡 전경 절집을 벗어나 본다. 방문 당일 절간에는 공사로 인하여 분주했다. 담장을 의지하고 활짝 핀 배롱나무, 문짝을 분할하여 열어 둔 작은 쪽문 그리고 가까이서 보고픈 불교벽화 그림과 절간을 따라 거닐며 만나는 탑과 직지사 불교박물관에서 만난 고마운 말씀들이 한 여름 무더위를 잠시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계곡에는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제법 소리를 내며 노래하였다. 숲 속 메미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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