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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청각 전경
법흥사지 칠층전탑(신세동 칠층전탑)을 만나로 가는 길목에서 제일 먼저 임청각을 만나게 된다. 임청각 담장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옛 안동 고성이씨 대종택으로 알려져 있는 임청각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군자정을 만나게 된다. 조선 세종 영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6째 아들 이증이 영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자리 잡은 후 중종 당시 형조좌랑을 지낸 그의 3째 아들 이명이 별당형 임청각을 짓고 그 후 허주(1726-1773)가 주인이 된 후 구한말에는 아홉 분의 톡립운동가가 태어난 충절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로 현판은 이황의 친필이며 대청에는 이현본 이항복의 시판이 내걸려 있다.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빠져 살수만 없지 않은가. 1911년 경북 안동 부호가 였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2.28~1932.6.15.) 선생은 전답을 처분하고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묘가 무슨 소용이냐’며 사당에 있던 위패를 땅에 묻고 50여 명의 식솔을 데리고 추운 겨울 그해 나이 52세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만주로 망명하는 길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한편의 시를 남기는데 旣奪我田宅(기탈아전택) 이미 내 논밭과 집을 빼앗아가고, 復謀我妻努(복모아처노) 다시 내 아내와 자식을 해치려 하네, 此頭寧可斫(차두녕가작)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此膝不可奴(차슬불가노)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 만주 삼원보 주변 토지를 매입 4월 경학사(耕學社)를 설립 및 부설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武官學校 )를 세웠다. 임시정부 지도체제도 혼란의 시기였다. 국무총리제로 출발했던 지도체제는 대통령제를 거쳐 1925년 국무령제(1925. 3~1927. 4)로 개편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국무령(國務領)으로 추대되었다. 이승만, 박은식에 이어 제3대 수반이되었고, 내분과 갈등에 물러난 이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통합운동을 지도하다 1932년 5월 병으로 갈림성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임종,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1990년 중국에 있던 유해를 모셔와 봉안하였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든 중앙선 밑으로 작은 굴다리하나 이어지고 겨우 들어서면 임시정부 초대국무령(1925년 9월 24일-1926년 1월)을 지낸 이상룡 선생의 생가를 만난다. 양반집이라고 보기에는 기품이 남다른 이 집은 중종 14년(1519) 형조좌량을 지낸 이명(李洺)이 만든 후 세월이 흘러 이상룡이 물려 받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1년 임청각을 제외하고 자신의 재산을 처분 그리고 만주로 향했다. 독립을 향한 염원으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1913년 아들 이준형에게 안동에 있는 마지막 재산 임청각을 처분하여 독립자금으로 사용하려하였으나 문종에서 세 번이나 구입하여 독립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한다. 일제가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아예 집을 없애려는 것을 지역사회에서 결사적으로 반발하여 그나마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룡 선생에게 앙갚음으로 99칸 대고택이던 임청각을 헐어내고 중앙선 철도(1936년 착공 1942년 개통) 부설을 구실로 흔적을 지우려 했으나 안동 지역민의 반발이 심하자 건물의 마당을 가로지르는 두 동강 내 버린 후 50여동의 건물이 있던 곳에는 철로가 생겨나고 지금 남은 건물은 안동철도청 관사로 사용했다. 철로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길목도 아닌 임청각에 철로를 내기위해 무려 10km 구간을 돌아오면서 터널을 3개나 뚫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하니 놀라울 뿐이다.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보물 제182호)은 조선 중기 1519에 조성한 누정으로 함께 있는 임청각은 우리나라 현존하는 최대의 살림집으로 안동 고성이씨 대종택으로 알려져 있다. 통상 99칸 대저택으로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를 비롯하여 군자정인 별당과 정원이 있었다. 조선 세종 영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6째 아들 이증이 영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자리 잡은 후 중종 당시 형조좌랑을 지낸 그의 3째 아들 이명이 별당형 임청각을 짓고 그 후 허주(1726-1773)가 주인이 된 후 구한말에는 아홉 분의 톡립운동가가 태어난 충절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구절로 현판은 이황의 친필이며 대청에는 이현본 이항복의 시판이 내걸려 있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부귀비오원 제향불가기 회양진이고왕 혹식장이운) 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며 극락왕생도 바라지 아니하네. 좋을 때 홀로 거닐다 때론 지팡이 세워두고 김도 매고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 살다 때가 되면 그 곳으로 돌아가 기꺼이 천명을 받으리라 에서 臨淸流而賦詩의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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