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운사 전경
▲ 고운사 입구 은행나무 가로수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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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념(無念),무주(無主),무상(無相)의 공간 무료주차 :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8 |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자 지장보살영험성지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불교 31총본산 중 한 곳으로 예부터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으냐고 물어 볼 정도로 명승이 자자했지만 해방이후 사찰은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최근 새롭게 중창불사를 통해 규모를 확장하고 있다. 오늘날 고운사의 말사로는 이름만 들어서 알 수 있는 안동 봉정사, 영주 부석사, 영주 비로사 등 경북지역 약 60여개의 말사를 두고 있다.
무념(無念),무주(無主),무상(無相)의 공간 '의성군 고운사'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던 고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
조계종(曹溪宗)의 조계(曹溪)는 중국 선종의 6대 조사(祖師)로 추앙받는 혜능선사가 설법을 하던 지명이며, 해능선사를 '조계(曹溪) 혜능(慧能)'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계종의 시작은 중국 선종이 국내정세가 혼탁했던 신라 말 혜공왕 이후 우리나라 들어오면서 조계종 종단이 꾸려졌고, 도의국사가 개산(開山)하여 보조국사, 태고 보우국사에 의해 중창되어 오늘에 이른다. 조계종의 종지는 선(禪)을 그 본체로 한다.
▲ 최치원 문학관에서 고운사 입구를 잇는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11월 10일 전후 아름답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 의상대사는 풍수에 의해 연꽃이 반쯤 핀 형국(부용반개형상)을 한 명당터인 등운산(524m) 골짜기에 사찰을 창건하고 고운사(高雲寺)라 불렀다. 이후 최치원이 이곳에 머물면서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만드니 최치원의 호를 따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된다. 도선국사가 머물던 시절 오법당십방사(五法堂十房舍) 즉, 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가 있었다 하며, 약사전에 모셔진 보물 제246호와 나한전 앞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이 이때 조성되었다 한다.
▲ 일주문 전경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인 일주문을 넘어 절집에 들어선다. 일주문을 시작으로 동서남북을 관장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ㆍ증장천왕ㆍ광목천왕ㆍ다문천왕이 모셔진 사천왕문을 지나면 왼편으로 작은 전각을 만나는데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고불전이다. 고불전에는 석불을 모시고 있으며, 독특한 ‘T’ 구조를 하고 있다. 사찰 경내로 들어서면서 계곡위 돌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올린 가운루를 만나며, 가운루 앞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오르는 최치원이 세운 우화루를 만난다. 우화루 벽면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으며 호랑이 시선은 탐방객을 따라 다니며 노려보고 있다.
고불전이 정확하게 어떤 용도의 절집인지 알 수 없지만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훼손상태가 심한 돌부처 1구가 모셔져 있다. 절집으로 들어서는 문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전각이란 점과 법당까지의 거리가 있어 궁금증을 자아낸다.
▲ 가은루 전경
일주문 앞에서 잠시 걷기로 했다. 고운사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만나는 천년으로 향하는 솔숲을 지나 천왕문에 도착하면 계곡에 발 담근 독특한 건물인 가운루를 만나게 된다. 지금이야 별 활용도가 없어 고은사 사진 전시장역활을 하지만 고은사 가운루와 우화루를 만든 최치원 선생과 여지, 여사의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위해 각기 다른 두 개의 기둥에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섬세함이 엿보인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며 황제에게 어대를 하사받은 최치원이지만 고향을 잊지 못해 돌아오게 되었지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전국을 유람하던 중 찾은 절간에서 자신이 호를 따 만든 절이 고운사가 아니던가.
▲ 가은루 전경 개울 위 가운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구름 위 우화루를 구상하고 만들었다. 조성당시에 없는 다리가 생겨 계곡과 함께 바라보는 운치는 잃어 버렸지만 계곡 바닥을 딛고 각기 다른 돌기둥 위에 올려진 건축으로 지금의 가운루는 1668년 중수를 한 것이다. 본래 가허루(駕虛樓)였지만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죽자 전국을 여행하면서 이곳 고운사에 들러 현판에 직접 어필을 남겼는데 바로 가운루이다.
▲ 가은루에서 바라본 정면 종각과 왼편 우화루 전경
▲ 우화루 전경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다는 우화루는 밖에서 보면 도교적인 의미의 우화루(羽化樓) 안에서는 불교적 의미의 꽃비가 향기로운 바람에 흩날린다는 의미의 우화루(羽化樓)가 붙어 있다. 바깥에서 신선이 되어 안에서 바깥 운치를 보면 꽃비가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지금은 다리가 생기고 주변이 정리되었지만 옛날에는 계곡을 따라 피어난 벚꽃이 가운루 주변에 흩날렸을 것이고 그 모습을 우화루에서 내려다보지 않았을까 싶다. 우화루 벽면에 호랑이 그림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시선을 피할 수 없다.
▲ 우화루 벽면 호랑이 그림
고운사에서 눈여겨 볼 것은 우화루 외벽에 그려진 호랑이 벽화로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따라 호랑이의 눈과 목이 움직이며, 광무 6년(1902)에 세운 연수전은 문경새재 아래 최고의 명당 터로 고종 황제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곳이다. 고운사가 그만큼 중요한 사찰이지만 워낙 깊은 산중에 있는 터라 외부인의 발길이 거의 찾지 않는 조용한 고찰 이였지만 최근 해동제일지장도량으로 지장보살영험성지로 알려지면서 방문객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지장보살에 관한 구전으로 예부터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 물었다 전한다.
▲ 약사전 전경 . 약사전에는 고운사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호)가 모셔져있다.
고운사 경내로 접어들면 제일먼저 찾아가는 곳이 고운사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호)을 모시고 있는 약사전이다.
▲ 고운사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호)
고운사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호)은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9세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불상은 우견편단의 법의에 항마촉지인 손 모양을 하고 끝이 날카로운 광배에는 연꽃과 넝쿨무늬.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 2016년 9월 보수작업을 한 삼층석탑(의성군 문화재 자료 제28호) 해동제일지장도량 지장보살 영험성지 고은사이다. 고은사는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신라 문무왕 원년(681) 등운산(524m) 골짝 연꽃이 반쯤 핀 형국을 취한 부용반개형상터에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최치원 선생이 여지, 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와 우회루를 세우면서 자신의 호를 따 고은사로 명명하였다.
고운사삼층석탑(의성군 문화재자료 제28호)는 2층 기단 위 3층 탑신을 올린 형태로 기단에 안상무늬와 기둥 모양을 통해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 1992년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나한전으로 바뀌었다, 고운사 삼층석탑이 고운사에서 가장 높은 나한전 아래 자리잡고 있다. 삼층석탑이 경내 넓은 공간을 두고도 높은 곳에 자리한 이유는 알수 없다. 고운사 옛 대법당이 바로 오늘날 나한전으로 이 법당은 현재의 대웅보전 자리에 있던 건물을 1992년도에 대웅보전을 신축하게 되면서 기존 대웅전을 삼층석탑 위로 옮겨 나한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 고운사 중심법당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1992년 첫 향을 올린 전각으로 고운사 중심법당이기도 하다. 50여평 규모의 법당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법당 앞에는 석등이나 석탑이 없다. 삼층석탑 윗편 언덕에 올려져 있는 나한전은 본래 고운사 대웅전이라 한다. 1992년 오늘날 대웅보전을 신축하면서 옛 대웅전을 이전하여 나한전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옛 사찰의 명승에 비하여 대웅전 규모가 소박하다.
▲ 연수원 전경
사찰내 만나기 힘든 건물이 있으니 바로 연수전이다. 연수전은 최초에 영조가 내린 어첩을 봉안하던 건물이며, 고종이 새로 조성하였다. 연수전에서는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곳으로 사방 독특한 벽화와 함께 건축미가 위엄을 갖추고 있다.
고운사연수전(의성군 문화재자료 제444호)는 영조가 내린 어첩을 봉안하는 곳으로 독특한 건물구조와 사면에 그려진 벽화가 신비로움을 자아내며 전국에서 기가 쌘 장소로 알려져 나침반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왕의 권위를 의식하여 담장을 둘렀는지는 모를 일이다. 연수전 건물에는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운릉도와 봉황도 그림과 무병장수를 위한 장생도가 그려져 있다.
고운사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건물이 바로 연수전이다. 일반 절간에서는 볼 수 없는 건물로 풍수 지리적으로 최고 명당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을 봉안하기 위해 영조 지시로 영조 20년(1744) 조성 후 고종 39년(1902) 왕실의 요청으로 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자 새롭게 만든 건물로 절간에 유교적 이념을 가진 사례로 입구에 행서체로 당대 명필가로 알려진 기당 김성근(1835~1919)이 쓴 만세문 현판과 함께 솟을대문을 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과 측면에 각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에 12개의 기둥을 설치하고 팔작지붕을 올려놓았으며, 사방에 높은 담장을 쳐서 접근을 막고 있다.
▲ 고운사 진입구간 첫 관문 현존하는 전각을 보면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중심 본존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 큰 법당으로 1992년 완공한 후 신중단과 조사단, 영단을 두고 극락전은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 대세지 두 보살을 모시고 있다. 약사전에는 약사여래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고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선국사가 조성한 석불(보물 제246호)를 봉안하고 응진전 영산전으로 불리는 나한전에는 16나한을 모시고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다. 나한전은 본래 대웅전 건물 이였지만 대웅보전이 건축되면서 자리를 옮겨 나한전으로 바뀌었다.
▲ 고운사 입구 최치원 문확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은 어떤 인연으로 첩첩산중 고운사에서 머물었을까? 신라 경문왕 9년(869) 13세가 되던 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후 경문왕(景文王) 14년(874)이자 당(唐) 희종(僖宗) 원년 빈공과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정치가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최치원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885) 부친의 병으로 신라로 귀국 및 조정에 출사하여 당대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오르지만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894)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및 골품제의 한계를 느끼고 외직을 자청하여 여러 지방에 태수(太守)로 떠돌다 난세를 비관하여 유랑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때 이곳 고운사에 머물다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최치원은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서 신발만 남기고 신선이 되었다 하여 유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종 9년(1018) 천우가 대웅전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전각을 중창하면서 극락전에 모신 불상은 천해의 꿈속에서 본 불상을 송도 대흥산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극락전에 모시고 있다 전하며,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불상은 성종 13년(1482) 안동 갈라산 낙타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명부전은 300년 된 건물로 사후 인간을 심판하는 장소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삼성각은 1998년 새로 짓고 민간신앙인 산신. 칠성. 나반존자의 탱화를 모시고 1997년 만든 용왕당에는 용왕의 탱화를 모시고 있다. 이외 참선공간인 고금당과 큰스님이 머무는 고운대암, 스님의 공양장소인 만덕당, 방문객의 숙소인 무설전, 상주대중의 숙소인 열반당, 1999년 연수전 옆 건물을 이전하여 숙소로 사용하는 대향각, 선방으로 사용하는 백련암, 영조가 내린 어첩을 봉안하던 연수전, 계곡 위 제각기 다른 기둥을 세운 최지원이 만든 가운루와 우화루,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이 지키는 천왕문과 국내 사찰 중 가장 아름다운 일주문, 오래된 석불이 안치되어 있는 고불전, 객실인 적묵당, 소임을 보는 스님들의 숙소와 차실로 사용하는 연지암, 서산대사 진영을 모시던 곳을 현재 스님의 숙소로 사용하는 아거각이 있다.
고운사에 현존하는 전각은 총 25동이 있으며 불교유물로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호), 고운사삼층석탑(경북문화재자료 제28호), 고운사가운루(경북 무형문화재 제151호), 고운사연수전(경북 문화재자료 제444호), 오동학촉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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