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사는 대비사 가는 길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653번지
아픔이다. 큰 몸집으로 작은 공간에 갇혀 있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화재로 인하여 화상을 입었다. 흡사 사람이 화상을 입은 것과 꼭 닮아있어 더욱더 안타까운 불상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꼭꼭 숨겨 버린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화상으로 신도 앞에 나서기 싫어 스스로 숨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을 힘주어 열자 한줌의 햇살이 공간을 비집고 불상 주변을 밝혀 준다.
불상을 둘러싼 보호각 그리고 보호각을 둘러싼 토석담장속에는 청도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 외 또 다른 불교유적이 있다. 보호각 앞 1기의 탑은 기단부를 제외하고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망실되어 정확한 탑의 형체를 알 수 없지만 삼층석탑으로 추정되며 상부 초층탑에 가로 세로 320mm, 깊이 140mm 방형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석재를 이용 복원하였는데 탑 높이는 2.78m이다.
▲ 훼손이 심한 삼층석탑이 입구에 세워져 있다.
▲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화강암 재질에 전체높이 2.76m, 불상높이 1.54.m, 대좌높이 1.2m로 우리나라에서는 대불에 속하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도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은 보물 제203호로 불상은 1928년 마을 화재 당시 얼굴윤곽은 형체를 잃어 버렸다 일부분은 파손되었지만 불상이 갖추어야 할 자비로움은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인상과 뚜렷한 삼도 그리고 가녀린 허리 등 조각수법에서 장인의 세련미와 기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대좌는 상, 중, 하대로 구분하여 연꽃모양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하는 불상으로 불상이 있던 이 일대가 당시 소작갑사 또는 대작갑사 일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이는 마을주변에서 사찰용 기구 와 와병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 한켠에 광배를 세워 놓았다.
항마촉지인 수인을 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석가여래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다소 뒤떨어져 균형미를 잃었다. 청도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은 1928년 마을화재로 훼손, 1963년 1월21일 보물 제203호 지정 되었고, 1992년 53.5m 토석담장 시공 및 1993년 파손된 광배 접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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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이 있던 절터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마을 주변 일 것이고 불상의 크기를 통해 상당한 규모의 절집이 존재하였을 것이지만 불교배척을 통해 절집이 어쩌면 당시 권력가의 재산으로 넘어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마을 주민의 협력으로 떠돌지 않고 어쩌면 옛 터 한 귀퉁이 땅일지 모를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마을주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본다.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을 떠나 곧장 직진하면 마을길 끝자락 대비지를 휘감아 길이 이어지고 마지막 길목에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때 오른쪽으로 진입하면 대비사가 있다. 대비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종무소, 요사 그리고 부도탑군이 있다.
백곡 계곡 위 자리잡은
대비사
대비사가 있는 이 일대를 일제강점기 당시 박곡 지명 이전에는 계곡이 많아 백곡이라 불렀다 한다. 갈래갈래 뻗어 내린 산허리는 크고 작은 계곡을 만들고 물길은 흘러 작은 소류지를 만들고 소류지 따라 생겨난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 작은 절집 대비사가 아낌없이 속을 내보이고 맞이해 준다.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호거산에 자리한 아담한 절집 대비사는 창건 당시 주변의 아름다운 계곡이 있어 백곡이라 부른 계곡 위 절집을 지었을 것이다.
▲ 대비사의 정확한 중창기록은 알 수 없지만 신라 진평왕 11년(589) 원광법사에 의해 창건, 고려 인종 때 원응이 중창하였다는
설과 신라 진흥왕 28년(567) 신승이라 불리는 창건주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대비사에로 들어서면 대웅전을 비롯하여 향로전, 요사, 요사채, 삼성각이 자리잡고 계곡쪽에 부도전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으며, 보물 제834호로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1685년(조선 숙종 11년)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웅전 안을 살펴보면 복숭아꽃 필 무렵 황하강에 살던 잉어가 험난한 물살을 거슬러 용문에 도착하는데 워낙 협곡 물살이 거칠어 올라가기 힘어 용문에 오른 잉어는 천신의 도움을 받아 우레와 번개를 쳐 그 꼬리를 불태워 용이 되는데 그 그림이 대비사 대웅전(보물 제834호) 창방 단청에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대비사 창건설화로 557년 신승이 운문산 금수동 북대암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도한지 3년이 되던 날 산과 계곡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놀라 우는 것을 보고 산에 오령이 살고 있음을 알고 7년 동안 5개 사찰을 조성하였는데 그때 만든 사찰 중 하나가 대비사로 소작갑사라 불렀다 한다. 운문산 중심에 대작갑사(운문사)를 두고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소작갑사(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두었다.
▲ 부도는 취하청권(영조44년/1768), 화우상?, 영성, 김파, 영파, 매월취헌, 청련혜명, 영암인철, 무명 8기 및 비로 포공 장선
(1801년 유공비), 수월 삼성(1724), 용암 백곡(1725), 취하 청권(1775), 허곡 만웅(1813), 허현 설안(1717)등이 확인되고 있다.
대비사 경내를 거쳐 계곡으로 내려서면 대비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2004년 조성한 부도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부도 16기, 비 6기가 오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 대비사 지명은 불교의 대자대비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설과 신라 왕비의 대비가 수양차 절에 머물면서 소작갑사가 대작갑사로
바뀌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비사는 당초 박곡리마을에 세워졌지만 고려시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 절집 앞 대비지가 참 맑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하였던가? 스쳐가는 길목에 절집 앞이지만 염치불구하고 낚시대
하나 드리우고 머물다 가고픈 생각이 스쳐간다.
백곡에 존재했다는 계곡은 메말라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그나마 부도전 앞으로 흐르는 계곡물과 인근 계곡으로 흘러든 계류가 모여 대비지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물색 색감이 두렵게 만든다. 옛날에는 말을 타거나 박곡마을에서 걸어 들어왔을 대비사로 오는 길목은 첩첩산중으로 호랑이가 나올 법도 할 만큼 인적이 끊어진 곳이지만 지금은 도로가 잘 형성되어 있는가 하면 절집이 거의 평지에 위치한 것이나 다름없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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