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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주] 불상군을 만나는 남산 삼릉골~용장골

허영꺼멍 2015. 5. 31.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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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경주 남산 상릉골~용장골

삼릉주차장 - 삼릉 - 상릉계 석조여래좌상 - 삼릉계 마애관음보살 - 삼릉계 선각육존불 - 삼릉계석불좌상

상선암 -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 금송정 - 상사바위 - 용장사지 - 용장사지삼층석탑 - 용장사지 삼륜대좌불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 - 용장골 주차장

 

 

남산 코스를 가볍게 잡았다. 삼릉주차장-삼릉-상선암-바둑바위-금오봉-남산진입도로구간-용장사지-용장골-용산주차장-35번 국도-삼릉주차장을 잇는 짧은 동선을 따라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남산 입구 삼릉 주차장에 주차하고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

 

▲ 남산 등산로

 

삼릉으로 오르는 길은 부잣집 정원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수형을 가진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길을 터놓는다.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이라 부른다. 이 계곡에는 11개소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탐방로이다.

 

▲ 삼릉 소나무 숲

 

사적 제311호 경주 남산 입구에서 만나는 이정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이른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었으며,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불교 관련 유적 이외에도 남산에는 신라의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 신라 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서라벌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인 남산신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이 간직되어 있다. 그 뿐 아니라 여러 전설. 설화들이 남산 곳곳에 깃들어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도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0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삼릉 초입부 숲길

▲ 삼릉

 

 

삼릉에서 출발을 고하다.

 

안개가 스멀스멀 찾아드는 날 빛내림이 좋아 전국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삼릉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54대 정명왕, 53대 신덕왕, 8대 아달라왕의 왕릉이 일렬로 모여 있는 곳으로 산행 출발 지점이 되기도 하는 곳으로 잠시 가볍게 눈인사 올리고 천년의 숲을 향해 두려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첫 발을 내 딛는다.

 

▲ 삼릉 초입에서 만나는 흩어져 있던 훼손된 불상 파편

 

탐방로 초입에서 만나는 부처는 세월에 노출되어 깎여 세부적 표현을 알 수 없다. 얼굴은 이미 사라져 버린 탓에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신라인의 당당한 기상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삼릉을 떠나 초입에서 만난 목 없는 석불과 석재의 파편들이 오른쪽 탐방로에 모여 있다.

 

 

땅속에 묻혀 있었던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초입 불상을 만난 후 조금 더 숲길을 따라 산책하듯 오르면 목이 없는 불상과 바로 위편에서 바위에 새겨진 1구의 불상을 만날 수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은 1964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km 남쪽 땅 속에서 머리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매듭진 가사 끈과 아래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소중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옷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으로 부터 왼편 언덕 바로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불상은 풍만한 얼굴에 삼면보관을 올린 관음보살상으로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 하였다. 마애관음상과 석조여래좌상을 거쳐 산길을 오르면 약간의 언덕길과 계곡이 이어진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은 높이 약 1.5m로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이후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은 남산의 삼릉계곡이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 되어있다. 얼굴은 풍만하며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을 썼는데, 보관에는 작은 불상이 따로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 주위에는 주칠의 흔적이 남아 있어 붉은 빛을 띄고 있으며, 작게 표현된 입가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뚜렷하다. 관음보살은 연꽃으로 표현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얇게 조각된 옷자락은 허리 아래까지 내려와 양 다리에 U자형으로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계곡 돌다리 건너 선각육존불을 만나다.

 

 

선각육존불은 제법 넓은 공간을 앞에 두고 있으며, 바위면 2개를 이용하여 독특하게 불상을 표현 하고 있는데 꽃을 공양하는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로 남산에서 확인된 부처 중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개 바위면 에 각각 3구씩 표현되어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앞면 바위에는 서 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보살이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꽃을 공양하고 있는데 아미타삼존으로 부르며, 불상을 보호하는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 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어리 둘레에 두광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 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을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 들고 잇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보물 제666호 경주 삼릉계석불좌상

 

 

경주 삼릉계석불좌상은 삼릉에서 올라오면서 만나는 보물 제666호로 상릉계곡 중부능선쯤에 위치하고 있다.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으로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파손이 심했던 불상을 보수하여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 조각수법으로 8새기 후반에서 9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상은 높이 1.42m, 대좌 높이 0.96m 불상의 층높이 2.38m이다.

 

 

보물 제666호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얼굴은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2007~2008년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 정비하여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묘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 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안내글에는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화염문과 당초문을 섬세하게 새겨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는 상대에 앙련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꿏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에는 면마다 안상을 두었으나 하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선암에서 쉬어가다.

▲ 상선암 여름 풍경

▲ 상선암 봄 풍경

 

 

상선암으로 오르는 경사길 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길처럼 꾸역꾸역 올라야 하는 인내의 길이다. 상선암 불경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다 언덕에 올라서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흩뿌린다. 천년의 길에서 만나는 작은 산중 암자에서 땀을 식혀가며 물 한잔을 탐해본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만나다

 

 

유형문화재 158호 남산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은 지금 동편의 암반에 균열 박리되어 위험하여조 심하여야 한다는 안내판과 함께 상선암에서 오른지 5분도 안 돼 큰 규모의 좌상이 자연석 을 광배로 한 모습으로 공간 시선을 모우고 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은 바둑바위 남쪽 중턱 오르막길 왼편 벼랑 위 돌출된 자연석을 다듬어 조성한 불상으로 겹겹이 형성된 자연석을 광배로 활용하여 따로 광배를 만들지 않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광배를 만들려다 그만 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높이 7m로 냉골에서는 가장 큰 불상으로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해 앉아 있으며, 입체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아래편에서 올려다보면 앉은 발을 모습이 크게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가지런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결좌부좌를 하고 있다. 작품은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불좌상은 현재 유형문화재 제 15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만 바위에 균열이 심하고 풍화가 진행되어 급급한 훼손이 일어나고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삼릉계석불좌상은 현재 앞을 지나는 출입로를 통제하고 있어 당분간 만날 수 없다.)

 

금송정

 

 

금송정은 상사바위와 삼릉계석불좌상이 있는 바위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금송정이 자리 잡고 있다. 금송정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금송정은 이 곳 금오산에 있던 정자였는데 경덕왕때 음악가 옥보고가 가야금을 타며 즐기던 곳이다. 금송정이 있었다는 이곳 냉골 바위산은 그 모습이 괴상하고 거대한 바위 더미로 밑에서 쳐다보면 정상은 구름이 걸린 듯 드높아 보인다. 옆의 금오봉 방향에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는 상사암이라 한다. 옥보고는 이곳 금송정에서 바위들과 솔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벗 삼아 가야금을 뜯으며 세상 시름을 잊었다고 한다.”

 

 

상사바위

 

바둑바위 뒤편에 자리한 상사바위는 여느 산이면 다 있는 상사바위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바위의 규모는 압도적이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위하고 빌면 병이 낮는다는 속설이 있다. 바위 중앙에 재단을 만들어 놓았으며, 머리가 없는 작은 석불 1구가 비스듬하게 서 있다.

 

 

 

산아당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낳는 모습을 돌에 새겨놓았다. 신라 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와 소원을 빌던 곳으로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 있다고 동경잡기에 전하고 있다.

 

바둑바위와 석불을 금오산 정산 능선에서 넌 저시 바라보니 천년고도 신라인은 남산 골짝을 따라 종교적 이념에 사로잡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위에 부처를 새기고 극락장생을 빌었는지. 왜 이곳에 집중적으로 조성했는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든다.

 

상사바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상사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백여 발이나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게 솟아 있어 오르기가 어렵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위하고 빌면 병이 낮는다. 산아당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낳는 모습을 돌에 새겨놓았다. 신라 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있다. 위의 글은 동경잡기에 실려 있는 상사바위에 대한 기록이다. 상사바위는 높이가 약13미터, 길이가 약25미터 가량 되는 큰 바위로 이 바위를 서편에서 보면 냉골 여울에 뿌리 내리고 수십 미터 높이를 솟아오른 첨탑처럼 보이고 동쪽에서 보면 산등성이 위에 직사각형으로 육중하게 솟아 있어 염라대왕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험상궂은 상이다. 바위 중간쯤에 가로파인 틈에 돌을 던져 그곳에 얹히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던진 돌이 떨어지면 바위신이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상사바위의 남쪽 편에 아기를 낳는 듯 한 갈라진 바위인 산아당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금오봉에 도착하다

 

 

금오봉(468m), 고위봉(494m)을 두고 있는 남산지구는 행정구역상으로 남산동, 탑정동, 인왕동, 배동, 평동, 내남면 용장리, 노곡리로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남산은 남북 길이 9km, 동서 너비 4km에 이르는 타원형으로 50여개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남산이 유명한 것은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 내 불교유적 중 남산에 집중적으로 절터 150여 곳이 확인되었고 정산을 비롯하여 주변에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는 것.

 

 

용장사터에서

 

 

용장골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용장계곡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며 용장사지 등 15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400M 아래로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는데 용장사는 이 계곡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용장서터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이 자리 잡고 있다.”

 

용장사에 관한 안내글로는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을 개칭한 대현스님이 거주하신 곳이며 조선 세조 때의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 스님(매월당 김시습 1435~1493)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대헌스님이 삼륜대좌불을 돌면 부처님도 따라 머리를 돌렸다고 하며, 그 뒤쪽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지금도 따뜻한 미소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보물 제186호 용장사지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통일신라시대 후기 제작된 높이 약 4.42m 탑으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아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윗부분이 없어져 탑의 높이는 4.42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이며,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옛 용장사터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저술한 사찰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석탑과 석불상이 남아 그 옛날의 모습을 회상하게 만든다. 삼층석탑은 대웅전 위편에 자리 잡고 자연암반을 이용 밑단을 만들고 그 위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가 하나의 석탑으로 만들어 일체감을 조성한 것이 특징으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알려져 있으며,주변 파손된 몸돌로 보아 당시 이곳 2의 석탑은 제각기 형태를 달리한 탑으로 남산리 삼층석탑과 유한 모전석탑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을까 싶다. 석탑 아래에는 옛 용장사터로 추정되는 장소와 함께 불상군이 자리 잡고 있다.

 

보물 제186호 경주 남산 용산사곡 삼층석탑은 법당터 보다 더 높게 세워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으로 하늘과 맞닿을 듯 웅장함이 돋보인다.

 

 

보물 제187호 용장사지 삼륜대좌불

 

 

삼층석탑에서 바위길 난간을 내려서면 불상 1기가 눈에 고정된다. 목이 잘려나간 상태로 있는 안타까움…….일본인에 의하여 목이 잘려버렸다 한다. 불상은 삼륜대좌 위 올려진 특이한 모습으로 미륵장육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올려진 삼륜대좌는 조각 솜씨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석공 섬세함을 엿볼 수 있으며, 전체적인 균형이 잘 잡혀 있다. 8세기 중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은 입체감이 훌륭하여 목만 존재한다면 흡사 살아있는 모습으로 사실감이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용장사는 신라 유가종의 대덕 태현스님이 주지로 있었다고 전하며, 남산일대에서 가장 정교한 불상으로 삼륜대좌는 흡사 원형삼층석탑을 연상케 한다.

 

 

용장사지는 甲戌三月日茸長寺(갑술3월일용장사)’라 적혀 있는 기와가 수습되면서 용장사터가 확인된 곳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용장사에는 대헌스님이 머물렀으며, 돌로 만든 미륵장육상이 대현스님 염불소리를 듣고 탑을 돌면 미륵상도 같이 스님을 향해 얼굴을 돌렷다. 한다. 대현스님에 관한 이야기로는 신라 경덕왕 12(753) 가뭄으로 곡식이 말라죽게 되자 경덕왕은 고승 대헌스님을 대궐로 불러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정수 물이 없어 재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대현스님이 향을 피워 염불을 외우니 갑자기 메마른 우물에서 일곱 길이나 되는 물이 솟아 올랐다 한다.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

보물 제913

 

 

석불 좌상 뒤편 바위에 또 하나의 부처가 모셔져 있다. 남산 일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마래불로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은 머리둘레의 두광과 몸 둘레의 신광 두 줄기를 표현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왼쪽 어깨에 글씨가 새겨져 있지만 알 수가 없고 단지 날짜만이 확인된다. "태평28" 그 다음은 알길이 없지만 이 마애불의 조성시기가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불은 남산에서 발견되는 다른 마애불 보다 얼굴이 둥글고 귀가 무척 길고 손가락이 몸집에 비하여 턱없이 큰 편으로 입체감은 떨어진다.

 

보물 제913호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 조성된 높이 162cm 여래불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불상은 자연 암벽에 조각된 것으로 균형 잡힌 신체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돋보인다. 얼굴은 풍만하며 귀는 누에서 목까지 크고 길게, 머리카락은 내선형으로 표현되었다. 목에는 3개의 선으로 표현된 삼도가 뚜렷하다. 옷의 주름선은 얇고 촘촘한 평행선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어깨 바깥 부분에는 글씨가 새겨 있으나 많이 닳아있어 판독이 어렵다.”

 

 

하산길에서 만나는 설잠교는 총연장 26.0m20031230일 착공하여 20041118일 완공한 교량이다. 용장골에서 가장 큰 계곡을 건너는 교량으로 매월당 김시습을 기려 법호인 설잠을 붙여 설잠교라 부른다.

 

 

용장사지를 내려서면서 당시 이곳의 불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남산자락에 위치한 절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삼층석탑 두기를 천상에 올려둔 모습으로 배치하고, 그 아래는 좌상과 석불을 안치하며 법당이 존재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서면 김시습이 머물면서 한문소설 금화신화를 집필했던 요사채가 자리 잡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용장사는 남산의 으뜸 위치에 있는 사찰로 태평세월 속에 불심의 근본을 실천하다 신라불교의 패망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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