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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서악동 1125-1 경북 경주시 서악지구 문화유산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신라 무열왕릉(사적 제20호)-서악리고분군(사적 제142호)-서악동귀부(보물 제70호)-김인문묘-김양묘-도봉서당-서악동바위구멍유적-서악동삼층석탑(보물 제65호)-서악동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호)-서악서원(경남 기념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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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릉과 김인문, 김양의 묘역을 둘러본 후 차량 편으로 도봉서당으로 향한다. 골목길 끝자락을 따라 약 600m 진행하면 도봉서원 뒤편으로 주차장이 나오며, 주차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면순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 도봉서당 전경(숙박체험이 가능하다.)
서악지구에는 선도산(380m) 정상아래 마애석불상(보물 제62호)를 비롯하여 입구에는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묘(사적 제20호) 그리고 도봉서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7호),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 서악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 또한 서악동바위구멍을 통한 선사시대의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는 곳이다. 서악지구에는 무열왕릉과 서악동 고분군 뒤로 서악동삼층석탑 주변에 많은 고분이 위치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헌안왕릉, 문성왕릉, 진지왕릉, 진흥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도봉서당
경주를 여행하면서 잠자리를 고택에서 하루 보내고 싶다면 경주 서악지구 도봉서당은 어떨까 싶다. 도봉서당 연어재가 숙박체험을 할 수 있어 인기다. 도봉서당은 옛 신라 왕릉급 고분 50여기가 산재해 있는 선도산 쉰골골짝으로 들어서는 초입이자 마을 끝자락에 자리한 조용한 공간이다.
▲ 도봉서당 전경(방문 당일 페인트칠을 하여 접근이 어렵다.)
도봉서당은 조선 중기 문신 황정(黃玎 1426~1497)의 학덕과 요행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재실로 중종 1년(1545) 추보재(追報齎)를 조성 후 1915년 그 자리에 도봉서당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독특한 서당이다. ▲ 연어재
이후 전란과 긴 세월을 거치며 훼손되었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불권헌 황정의 후손들이 1915년 추보재가 있었던 자리에 도봉서당 일곽을 중건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도봉서당에 관하여 안내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서당은 숭앙문. 도봉서당. 추보재. 연어재. 상허당 등 모두 7동이며 일종의 서원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배치형식은 재사를 강당 뒤에 둔 전강당 후재사형인데, 이는 경상도 지역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강당(도봉서당)은 정면 5칸, 옆면 1.5칸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옆. 뒷면에 쪽마루를 둘렀다. 사당(상허당)은 정면 4칸, 옆면 1.5칸이며, 중당협실로 구성된 바로 볼 때 강당형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재(연아재)는 남쪽과 동쪽면을 모두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여 두 개의 정면을 갖게 한 점이 눈길을 끈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낮은 자세로 화려한 장식없이 서 있는 1기의 탑 그리고 주변에는 알 수 없는 무덤이 선도산 자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경주에서 만나는 고분군 중에서 결코 만만치 않은 선도산에 자리한 고분군은 왕릉임을 짐작케 하며, 무덤의 시작지점에 탑이 서 있어 이들을 위한 사찰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 서악동 삼층석탑
도봉서원 담장너머 높이 4.06m,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보물 제65호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석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축조된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모전탑 계열에 속하며, 서악서원의 뒤편 선도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덩이 여덟 개를 2단으로 어긋물리게 쌓아 만들었다. 1층 몸돌 남쪽에는 문틀을 얕게 파서 표시하였으며, 그 양쪽에는 인왕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두었으며, 몸돌에 비해 커서 무거운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형식의 유형분포를 조사 연구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므로 중요시된다. 경주 남산동 동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듯 하며 시대와 조각 수법에서 다소 떨어진다.”
▲ 정면에 새겨 놓은 인왕상
통일신라시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약 5.1m 경주서악동삼층석탑은 이형기단 위 3층 탑신을 올린 모전석탑 형식을 하고 있으며, 현재 상륜부 부분은 사라진 상태이며, 석탑을 이루는 주요 구성하는 방법이 전탑에서 나오는 기법이 엿보이는 작품이며. 탑이 있는 주변 지형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탑 주변에는 알려지지 않은 많은 왕릉과 고분이 산재하여 원찰의 성격을 지닌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정면 감실 문에는 인왕상이 문을 지키고 있다.
서악동 바위 구멍 유적
서악동 도봉서원에서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제65호)으로 향하는 입구에 위치한 서악동 바위 구멍 유적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유적은 표면에 크고 작은 홈들이 500여개가 새겨져 있어 성혈바위 또는 바위구멍으로 불린다. 제작 시기는 선사시대로 추정되며, 바위의 크기는 장축 780cm, 단축 210cm이다. 바위에는 기하학적 문양과 여러 선들이 연결되어 있어 농경시대의 민간 신앙과 관련된 유적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형태의 바위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는데 학계에서는 바위구멍을 별자리와 태양숭배, 풍요와 다산의 상징물 등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알바위, 알터와도 관련이 있다. 경주 풍물지리지에는 이곳을 용작곡으로 표기하고 있어 용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 오랜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혈군
성혈을 두고 동물의 피를 담은 구멍이라는 주술적인 의미로 알려져 있지만 성혈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동물의 피를 담았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때론 크고 깊고 작은 구멍이 주변을 감싸고 서로 잇는 듯한 홈을 통해 천상에서 가장 밝은 여름 하늘을 그린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몰런 전체를 지도처럼 새긴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순서 없이 새긴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국내에서 확인된 성혈은 주로 무덤 덮개로 알려진 칠성판에 그려지거나 마을 어귀 낮은 지대에서 확인이 되고 있어 전국적으로 집단적 무덤이나 어떤 의식에 동원된 것이 아니라 일부지역에서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서악동 삼층석탑과 구멍바위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선도산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산 지형을 따라 우회하면서 오르는 길과, 곧장 직선으로 올라서는 두 길이 있으며, 우회하는 길은 약 1.5km 정도 오르며, 직선 구간은 1.2km 정도 거리이다.
▲ 삼층석탑 주변에 자리한 고분군
산길을 오르다 보면 좌, 우 고분이 많이 보이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고문이 신라 문성왕릉과 헌안왕릉이다. 신라 문성왕릉은 사적 제178호이다. 능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능은 신라 제46대 문성왕(재위 839~857, 김경응)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 헌안왕릉과 함께 선도산의 남쪽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능의 지름은 20.6m, 높이는 5.5m 이다.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진흥왕릉고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 선도산으로 오르는 좌,우 고분군
신라 헌안왕릉은 사적 제179호이다. 능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능은 신라 제47대 헌안왕(재위 857~861 김의정)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왕릉과 함께 신도산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지름 15.3m, 높이 4.3m 되는 이 능의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은 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선도산 마애여래삼존입상
약 1.5km 구간을 오른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가느다란 빗방울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길을 오른다. 서악지구는 선도산(3880) 정상을 중심으로 서악동, 효현동, 충효동이 포함된다. 19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선도산은 안탑깝게 산 능선이 화재로 인해 그을린 소나무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가득 매우고 있다. 2009년 5월 11일 유품을 불태우던 여행객의 부주의로 인해 산이 불타버려 앙상한 가지만이 능선을 따라 이어져 인간이 자연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 얼핏 들은 이야기가 김춘추 부인 문희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 산길이 남편이던 김춘추의 사후를 빌기 위해 왕후가 오르내렸지 않을까? 무열왕은 661년 죽음과 이후 아들 법민이 문무왕이 되어 김유신과 삼국대업을 이룬다. 그리고 김유신은 79세가 되던 673년 죽게된다. 김춘추의 부인이 된 왕후 문희는 김춘추의 묘가 내려다 보이는 한적한 곳에서 남편과 김유신의 내세 안녕을 빌지나 않았을까? 그래서 인지 정상이 가까워 질수록 경주시내와 함께 무열왕릉이 한눈에 조망되기 시작하며, 가장 좋은 전망지점에 불상이 고분을 향해 선한 미소를 띄우고 있다.
▲ 선도산에서 바라 본 전경
이곳 선도산에서 보희 이야기는 뜬금없는게 아니다. 서악(선도산) 꼭데기에서 오줌을 누웠는데 서울(경주)이 오줌에 잠기는 꿈을 꾼 김유신 누이였던 보희는 그 꿈을 동생 문희에게 비단치마 한 벌에 팔게되었다. 처녀가 오줌을 싼 꿈이 어찌 좋을 수 있을까 마는 문희는 언니의 꿈 이야기를 듣고 사게 된 것이었고 이 꿈운 훗날 선덕공주의 도움으로 김춘추와 결혼을 하게 되며, 이후 김춘추는 태종 무열왕이 된다.
▲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을 만나기 전 건물
▲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가 이러하다. 입상 앞에 놓여 있는 불을 피우는 공간을 다른곳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보물 제62호)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사람들은 경주의 서쪽인 선도산 정상부근을 서방정토로 생각하고 이곳에 아미타 삼존불을 새겼다. 조각하기 힘든 암석에 높이 6.85m 나 되는 거구의 여래입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아미타여래 입상을 본존으로 하여 왼쪽에는 불상이 새겨진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상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이 잇는데 이 두 보살상은 옮겨온 화강석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 준다는 대새지 보살은 얼굴과 손 모양만 다를 뿐 관세음보살상과 동일하다. 조각솜씨로 보아 7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삼존입상 옆으로 사찰에 무슨 이런 건물이 있나 싶은 ‘성모사’가 있다. 성모사는 신라 시조모이자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알려진 성모를 모신 곳이다. 삼국유사 권5 감통편에는 이곳 성모와 관련한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기록을 통해 성모를 전하고 있다.
▲ 명문인지 알 수 없지만 한자가 어렴풋 보인다. ▲ 내려서면서 바라 본 경주
진평왕 당시 안흥사(오늘날 경북 영주시 어느 사찰)에 지혜라 불리는 여승이 불전을 수리하려하지만 힘이 모자랐고 그러던 어느 날 꿈속 선도산 성모가 나타나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고 하자 그 꿈이 기이해 다음날 땅을 파보니 그곳에서 황금 160냥이 나왔고 그 덕분에 불전 보수를 하였다 한다. 선도산 성모는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이 사소(娑蘇)였고 신선술을 배워 신라땅에 머물고자 하였고 황제였던 아버지가 솔개를 날려 머무는 곳에 집을 짓도록 하였다는데 그곳이 오늘날 선도산 정상아래 기암절벽 아래다.
성모에 관한 이야기는 선도산 성모가 진한(辰韓)에서 와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동국의 첫 임금이 되니 신라 혁거세왕과 알영(閼英)두 성인을 말하는 것이다.
서악서원
▲ 서악서원 전경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모두 불에 탔으나 이후 다시 세워졌다. 인조 원년(1623)에 서악서원으로 사액되었고, 당시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가 현판의 글씨를 썼다. 뒤에는 사당을, 앞에는 강당인 시습당을 배치하고, 문루인 영귀루를 맨 앞에 두어 전학후묘의 자리 배열을 하였다.”
시도기념물 제19호 서악서원은 서악동 내 김유신 장군과 최치원, 설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서원으로 조선 명종 18년(1563)에 만들었다. 사악서원을 만들 당시 문신이던 이정(1512∼1571)이 경주부운 벼슬로 지방유림의 뜻을 모아 만들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1602년 묘우, 1610년 강당과 동. 서재를 다시 짓고 인조 원년(1623) 나라에서 인정하여 서악이란 이름을 내렸다. 서악서원 현판은 퇴계 선생이 짓고 직접 쓴 글로 최초 서악정사로 부르다 훗날 서악서원으로 바뀌고 당시 서예가 원진해가 현판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김춘추 무열왕의 사후 세계는 선도산 정상에 자리한 삼존불 입상이 내려다보면서 오늘도 천년고도 신라를 지키고 있다. 부강했던 신라는 결국 포석정에서 열린 연회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리지만 가장 많은 시대적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여행가는 뚜껑 없는 박물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1편 무열왕릉으로 바로 가기 클릭 http://blog.daum.net/okgolf/546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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