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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트레킹 - 전남 해남군 대흥사-두륜산 두륜봉

허영꺼멍 2015. 11. 2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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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전남 해남군 대흥사 & 북미륵암

 

대흥사-북미륵암-금강너덜-천년수. 단일암터-두륜봉-구름다리-진불암-대흥사

 

▲ 대흥사 뒷편으로 두륜산 가련봉과 두륜봉이 조망된다.

막바지 가을 정취가 남아 있는 전라남도 해남군 두륜산을 찾아 먼 길을 달려간다.

 

두륜산(703m)은 주봉인 가련봉(迦蓮峰, 703m)을 위시하여 두륜봉(頭輪峰, 630m)고계봉(高髻峰, 638m)노승봉(능허대 685m)도솔봉(兜率峰, 672m)혈망봉(穴望峰, 379m)향로봉(香爐峰, 469m)연화봉(蓮花峰, 613m) 8봉이 유명한 곳이다. 두륜산 자락에 위치한 대흥사로 인하여 두륜산 지명이 바뀌었다.

 

오늘날 대흥사는 본래 대둔사(大芚寺)였고 대둔산으로 부르다 대둔사가 대흥사로 개칭하자 대흥산으로 산 이름도 바뀌었다. 이후 두륜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 5(514) 아도화상이 신라 진흥왕 어머니인 소지부인(昭只夫人)을 위해 왕명으로 창건하였다 한다.

▲ 일주문을 거쳐 들어서면 만나는 대흥사 전경

 

두륜산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 대흥사를 방문하였다가 뒤편 동백나무 군락지를 만나면서부터 인연이 되어 자주 찾는 곳이지만 산행은 항상 시간에 쫒겨 차일피일 미루어지다 올 겨울이 오기전 가을끝자락 두륜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두륜산은 1979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적 제508호이자 명승 제66호이다.

 

 

대흥사에는 대흥사 용화당(시도유형문화재 제93), 서산대사 의발 등 유물 일괄(시도유형문화재 제166), 대흥사 천불상(시도유형문화재 제52), 대흥사 대웅보전(시도유형문화재 제296). 응진전삼층석탑(보물 제320), 대흥사 관음보살도(시도유형문화재 제179), 표충사(시도기념물 제19), 해남 대흥사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547), 대흥사 서산대사유물(보물 제1357), 대흥사 서산대사탑(보물 제1347),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63), 대웅사 천불전(보물 제1807), 대흥사 영산화괘불탱(보물 제1552),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기록(보물 제1667) 외 부속암자에 보유한 유물로는 탑산사명 동종(보물 제88),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 북미륵암동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245), 만일암지오층석탑(문화재자료 제246) 등이 있다.

 

▲대흥사 주차장에서 만나는 부도탑 비석군에는 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부도가 함께있다.

 

대흥사서산대사부도(보물 제1347)는 대흥사 입구 부도전에 있는 팔각원당형의 석조부도로 전체 높이는 2.7m이며, 탑신 전면에 청허당이라 새겨놓아 서산대사의 부도임을 밝히고 있다. 부도에 그려진 다양한 조식은 다른 부도에서 흔치 않은 것이며, 탑비에 조선 인조 25(1647) 건립을 밝히고 있어 부도탑 역시 비슷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도탑에 새겨진 문양으로 중대석에 사자와 화문, 상대석에 연화문. 거북. 연꽃. , 옥개석에 다람쥐 등이다. 불교에서 이런 그림이 새겨진 것은 경북 영주 성혈사에 있다.

 

 

대흥사 경내로 들어서다

 

▲ 대흥사 대웅보전(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신라 진흥왕 5(544) 아도화상이 창건한 고찰이다. 한국불교의 원동력 호국불교의 정신이 꿈틀거리는 청정수행도량 대흥사는 조선후기 연담유일, 초의의순 스님이 기거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는 100여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의기투합 한 곳으로 서산대사의 옷과 밥그릇을 봉안하고 있는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삼재가 들지 않는 대흥사에 의발을 봉안케 하라는 유언을 한 후 대흥사는 빠른 발전을 하였다.

 

▲ 대흥사 석가여래삼존불좌상(보물 제1863호)

 

 

 

대웅보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대웅보전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서 중생에게 설법을 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각이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목조불이며 부처님 뒤에 있는 탱화는 1901년 조성한 것이다. 이 건물은 조선 현종 8(1667)에 중건된 적이 있지만 189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정면의 화려한 용두 장식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계단식 소맷돌 양쪽에 조각된 사자머리 한 쌍은 전각 수호의 뜻을 담고 있다.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 추사 김정희(1788~1856)1840년 제주도로 귀양 가다가 대흥사에 들러 대웅보전 편액을 새로 써서 이광사의 편액 대신 걸었다. 하지만 그 후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자신이 썼던 편액을 떼어내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 하였다고 한다.’

 

 

두륜산 대흥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에서 출발한 산줄기가 백두산을 거쳐 백두대간을 잇고 해남에서 끝을 맺으니 곤륜산의 ""과 백두산의 ""를 따 두륜산이라 부른다.

 

▲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보물 제320)는 신라 자장이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여래의 사리탑을 모신 삼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부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통일신라 양식을 따른 일반형 석탑이다.

 

1967년 탑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높이 12cm의 동조여래좌상이 확인되었다.

 

대흥사 웅진전 앞에 위치한 석탑으로 신라 자장이 중국에서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으로 전하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율사께서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19671월에 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12cm 높이의 여래좌상 1구가 발견되었다.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양식이 이 지역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대웅전 정면에서 왼편으로 무량수각 편액과 백설당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는 건물을 만나게 된다. 무량수각 편액은 추사 김정희 54세가 되던 해1840년 제주 귀향길 대흥사에 들러 쓴 글이며. 백설당 편액은 구한말 명필가였던 해사 김성근이 쓴 글씨체이다. 백설당은 자 구조를 한 건물로 1899년 화재 당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 대웅전을 돌아 나와 천불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사랑의 나무 연리근

 

2008년 대웅전앞 석축 보수과정에서 확인된 천불전 옆 4백년 된 느티나무 연리근(連理根)이 확인되면서 사랑나무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연리근은 가까이 뿌리내리고 자라는 나무가 서로 만나 한그루의 나무처럼 자라는 것.

 

 

천불전을 들러가다.

 

▲ 천불전(보물 제 1807호)

▲ 천불전 출입문의 독특한 문지방 모습

대흥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정면에 자리한 천불전 좌우 전각을 남원이라 부르며, 개울 건너 북원이라 부르며, 네 개의 산이 호위를 하고 있어 사천왕상을 따로 조성하지 않고 천불전 가허루를 넘으면 천개의 불상이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독특하게 저마다 가사()를 입고 있다.

 

천불전에 모셔진 불상은 1811년 소실된 후 완호스님에 의하여 다시 옥석으로 제작되었다. 천불은 쌍봉사 화승이던 풍계스님이 경주 불석산에서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오도록 하였다.

 

석공 열 사람이 무려 6년에 걸쳐 완성한 후 세 척의 배에 옮겨 해남으로 향하던 도중 배 한 척이 풍랑으로 일본 나가사키 현으로 흘러가자 일본인은 절을 짓고 모시려 하였지만 꿈속에서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 머물 수 없다는 현몽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순조18년인 1818년 지금의 자리에 안치되어져 있다. 지금도 천개의 불상 중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768구의 불상 하단에는 일()자가 표시되어져 있다. 천불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며 다불사상이 깃든 것으로 누구라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천불을 살펴보면 자신의 얼굴과 꼭 닮은 한분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

 

▲ 천불전 천불상(유형문화재 제52호

 

천불을 모실 때는 법신(비로자나불), 보신(노사나불), 화신(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을 반드시 모시고 동쪽으로 오방불이신 아측불, 남쪽으로 보생불, 서쪽으로 아미타불, 북쪽으로 불공여래, 가운데 애일여래를 중심에 모시고 주변을 천불로 안치한다. 천불전의 가사는 4년에 한 번씩 갈이 입는데 신도가 직접 가사를 만든다. 또한 갈아입은 가사는 삼재를 막는다하여 신도들이 앞 다투어 가져간다.

 

 

대흥사 천불전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장하는 부처가 계신 곳으로 천불을 모시고 있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천불전은 조선 순조11(1811)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3년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이며 다포계의 팔작지붕으로서 전형적인 조선후기 건물이다. 편액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썼다. 법당 중앙에는 목조 석가모니 부처님과 문수, 보현 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주위에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의 천불은 경주 불석산의 옥돌로 조성한 것으로 1817년 배로 싣고 오던 도중 부산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일본 큐슈로 표류해 갔다가 다음 해인 1818년에야 대흥사로 돌아와 봉안된 것이다. 그래서 천불 가운데는 어깨에 자가 적힌 불상이 있다. 4년에 한 번씩 천불의 가사를 바꾸어 드리는 불사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수하셨던 가사를 개인이 소장하게 되면 마음속의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많은 분들의 동참이 이어지고 있다.’

 

 

 

▲ 초의선사 동상

 

경내에서 만나는 초의선사(1786~1866) 동상은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한 분으로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분이다. 해남 대흥사 내 일지암에서 40여년을 정진하며 다선삼매에 들기도 했던 곳이다. 초의선사 동상은 차 한잔을 앞에 놓고 지팡이를 짚고 가부좌를 한 노년의 모습이다.

 

▲ 표충사

표충사 제일 안쪽에 위치한 표충비각은 서유린(1738~1802)이 조선 정조15(1791)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명"과 연담유일(1720~1798) 스님이 조선 증조16(1792)에 지은 "건사서적비명"이 나란이 자리잡고 있다.

 

북미륵암을 오르다

 

▲ 북미륵암을 찾기 위해 약간의 수고를 해야 한다. 사찰 뒷편을 따라 약 1.4km 올라야 한다.

▲ 북미륵암으로 향하는 앞서가는 연인들 모습이 가을을 담고 있다.

대흥사를 돌아 두륜산 정상으로 향하는 오심재를 거쳐 가련봉(703m)을 향하는 등산코스를 재단하여 북미륵암까지 오른 후 금강너덜을 따라 만일암터를 거쳐 두륜봉(630m)에 올라 조망한 후 구름다리를 따라 하산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늘 탐방은 산 정상을 오르기 위한 등산이 아니라 두륜산에 산재해 있는 불교문화유산을 가깝게 만나며 느끼기 위함에서이다.

 

대흥사를 떠나 일지암과 북미륵암으로 향하는 갈림길을 만난다. 북미륵암까지 1km 구간이란 이정표 안내에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가을 낙엽이 등산로에 곱게 내려 앉아 있으며, 탐방로도 넓어 올라가는데 큰 무리가 없다.

 

▲ 북미륵암 용화전 전경

▲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에서 내려다 본 요사채 전경

 

큰 길이 끝나자 대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살짝 모습을 보여주는 절집 계단을 딛고 오르니 산지형을 이용하여 조성된 작고 아담한 암자 그리고 백구 한 마리는 인기척에 귀찮은 듯 눈을 살짝 열어 보였다가 다시 엎으려 버린다.

 

천년의 미소앞에 경건한 마음으로 다가선다. 대흥사 북미륵암에 들어서면 용화전, 요사채 그리고 석탑1기를 만나게 된다. 용화전에는 천년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는 마애여래좌상(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이 모셔져 있으며, 석탑(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이 반겨준다.

 

북미륵암에서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와 건물 옆을 돌아가면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 건너편 언덕 위 북미륵암동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245) 등을 만날 수 있다.

 

 

▲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 북미륵암 동삼층석탑(문화재자료 245호)

▲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북미륵암은 북암이라고도 불리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대둔사지에 고려시대 진정국사 천책(1208~?) 스님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1754년에 온곡영탁 스님이 중건하셨고, 그 후 연담연일 선사, 백담행인 스님, 아암혜장 스님 등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강학을 열었다. 이곳에는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한 용화전과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 그리고 두 기의 삼층석탑 등이 있다. 용화전은 19854월에, 요사는 19954월에 중수하였다. 마애여래좌상은 암벽에 조각된 42m 높이의 마애불이다.

 

상호와 각 부분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11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불상이다. 마애불 우측과 건너편 산등성이에 있는 2기의 삼층석탑은 마애불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대흥사 응진당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석탑 양식이 이 지역까지 전하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의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탑이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신앙대상이다. 이 삼층석탑은 전체 높이 4.35m로 신라시대의 삼층탑 형식을 따라 만들어진 고려시대 작품이다. 외형적인 모습을 볼 때, 탑의 각 부분이 간략하게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탑의 기초가 되는 기단부분에 긴 돌을 사용하여 짜 맞추었기 떄문이다. 탑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려시대 초기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 북미륵암 동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245호)

 

마애불 시선과 마주하고 있는 절벽 위 우뚝 서 있는 동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5)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자연 암반 위에 기단부와 탑신부를 조성한 신라양식의 3층 석탑이다.

 

전체높이는 4.65m이나. 원래는 3층 옥개석(지붕돌)이 파손되어 있었으니 1995년 요사채 중수 때 함께 복원하였다. 자연 암반은 뒷면에서 보면 평평하지만 앞에서 보면 92cm의 높은 층단을 이루고 있어 지대석(기단을 만들기 위해 쌓은 돌) 역할을 하고 있다.

 

암반과 기단 사이의 빈큼으로 빗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5cm 가량의 홈을 파 놓았다. 기단부 옆에 파놓은 홈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 탑은 단층기단이나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조성연대는 경내에 있는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과 비슷한 10~11세기로 보고 있다.’

 

▲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마애불은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항마촉지인 자세를 취한 마애불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마애불 중에서 우수한 조각솜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높이 4.2m의 마애불과 함께 광배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해 놓은 4구의 비천상의 모습은 바라보는 그 자체가 황홀경이다.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은 신라하대(850~932)무렵에 조성되었다. 마애여래좌상은 도상과 조각수법은 한국 불교조각의 최성기인 8세기 양식을 계승한 수작이다. 오랫동안 미륵으로 불려온 이 마애불의 입지는 서남해안을 마주하고 있다.

 

조성 당시 신라는 중앙귀족의 분열과 호족의 발호로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럼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상하 사방에 공양비천상이 배치되었다.

 

본존의 존삼은 후덕하고 원만한 체모로 형형한 눈매는 근엄하고 위의가 넘치며, 두툼한 입술과 살이 오른 양뺨은 자애로움이 가득하다. 특히 마애불 상하좌우의 공양천 인상은 자세와 지물이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조상이며, 뛰어난 지물이 마애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도상이며, 뛰어난 양감과 자연스러운 신체조형은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양식에 비견할 만 하다.’

 

 

▲ 북미륵암에서 내려다 본 대흥사 전경

 

만일암지로 향하다

  

▲ 북미륵암에서 만일암지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금강너덜

탐방객들이 절간에서 머물다 오심재를 거쳐 가련봉으로 향한다.

 

북미륵암에서 오심재까지 600m, 그리고 노승봉을 거쳐 가련봉을 넘어 만일재로 내려선 후 다시 건너편 두륜봉으로 오기는게 보통 이 산을 찾는 탐방객의 주요코스이지만 우리팀은 북미륵암에서 중간 너덜지역을 거쳐 만일재로 곧장 이어지는 허리길을 따른다.

 

허리길은 경사가 없으며, 정상 전경을 못보는 대신 금강너덜 지역 아름다운 숲길과 천년수, 만일암터를 만나는 기회가 주어진다. 북미륵암에서 두륜봉까지 1.1km, 만일재 0.8km, 천년수.만일암터 0.6km 구간이다.

 

 

천년수를 만나다.

 

▲ 두륜봉에서 내려다 본 만일암지와 그 옆에서 숲에서 우뚝 서 있는 천년수

 

금강너덜을 지나 만일재가 가까워 질 무렵 탐방로에서 우뚝 서 있는 오랜 보호수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천년수이다. 느티나무로 무려 천백년을 살고 있어니 만남 그 자체가 경이롭다. 19992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수고 22m, 나무 둘레 9.6m로 만일암터에 있던 나무로 알려져 있다.

 

 

천년수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주 옛날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에 천둥과 천녀가 살고 있었는데 천상계율을 어겨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하루만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인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천년수나무에다 해가지지 못하도록 끈으로 해를 매달아 놓고 천녀는 북쪽바위인 북암에 좌상불상을 천둥은 남쪽바위인 남암에 입상을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녀는 앉은 모습의 미륵불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서있는 모습의 미륵불을 조각하는 천둥보다 먼저 불상을 조각하였다. 미륵불을 완성해놓고 한참을 기다려도 완성하지 못하는 천둥을 기다리다 못한 천녀는 빨리 올라가고 싶은 욕심으로 그만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버리고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로 인해 천둥은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 미륵은 미왕성으로 남게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수목이다. 예전에는 나무가 두 그루였는데 한 그루는 죽고 한 그무만 남아 있다. 식물학자들은 이 나무의 수령을 천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나무를 천년수라 부른다.’

 

▲ 탑 앞에서 옛 사지의 흔적 석등과 맷돌이 보인다.

만일암지오층석탑(문화재자료 제246호)

 

 

천년수를 만나고 돌아서면 갈림길이 나온다. 이때 아래 탐방로를 이용하면 자칫 만일암지를 스쳐 가 버릴 수 있으므로 위쪽 탐방로를 바로 오르면 숲 사이 탑 1기와 함께 옛 사지의 흔적이 흩어져 있는 사지로 들어 선다.

 

사지에는 석탑 외 옛날 사용한 것으로 보여지는 멧돌과 우물터가 남아 있다.

 

 

해남 대흥사 만일암지 오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6)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두륜산 정상부인 가련봉 아래 만일암지에 조성된 석탑이다. 만일암지의 흔적을 말해주듯 주변에는 석등 부재 등 많은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석탑의 현 상태는 단층기단의 5층이나, 정확한 조사가 이우어지지 않아 단층기단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또한 1층 탑신을 보면 한번 해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석등의 부재가 올려져 있다. 전체 높이는 5.4m이다. 이 석탑은 튼튼한 기단부의 구성, 조층 탑신을 새로로 세워서 결구한 기법, 옥새석 상면 네 뒤퉁이의 우동마루를 도드라지게 한 기법이 옛 백제석탑의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중반기(12~13세기)로 보고 있다.’

 

두륜봉을 오르다

 

▲ 만일재에서 바라 본 가련봉

▲ 만일재에서 바라 본 두륜봉

 

만일암재를 나서 두륜봉으로 향하기 전 먼저 만일재에 도착한다. 만일재는 가련봉에서 내려와 두륜봉으로 오르기 전 두 암봉 사이 평원으로 억새와 함께 시원한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만일암재에서 두륜봉까지 500m, 가련봉 700m 구간이며, 북미륵암까지는 600m, 대웅전까지 2.6km 구간이다.

 

▲ 두륜봉 오르면서 바라본 가련봉

▲ 구름다리 만나기 전 나무데크

▲ 구름다리

 

▲ 두륜봉 명물인 하늘다리를 만나기 위해 오르는 나무데크 계단

▲ 구름다리라 하여 허공다리가 아니라 석문이다. 흔히 하늘로 향하는 통천문이다 한다.

▲ 두륜봉 정상

 

 

두륜봉 정상에서 잠시 쉬어간다. 출발지점인 대흥사가 먼발치에 걸려있다. 고계봉(638m) 상부케이블카와 전망대와 오심재 그리고 가련봉을 마주한다.

 

하산 그리고 여행을 마무리 하다.

 

▲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하산한다.

 

하산을 한다. 두륜봉을 시작으로 다시 하늘다리까지 내려선 후 하늘다리에서 반대편으로 열려 있는 등산로를 따라 내려선다. 내려서는 길목에서 진불암과 상원암을 거쳐 내려올 수 있지만 진불암까지 하산하는 길이 급경사이며, 등산로가 좁아서 위험하다. 진불암을 거쳐 다시 표충사까지 내려서는 길에서 잠시 일지암을 들러 하산하여도 좋다.

 

진불암을 들러가다

▲ 진불암

▲ 암자로 들어서는 입구 오랜세월을 느끼게 하는

은행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산내암자인 진불암(眞佛庵)은 창건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암자이지만 주변 오랜세월 살아온 노거수를 통해 오래전 사찰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암자에는 정면으로 정면 3칸 응진당과 좌우 요사채와 향적당이 있다. 암자 내 응진당에는 조선 초기 목조 16나한상이 모셔져 있는데 본래는 고진불암에 있던 나한불로 강진에 살던 어부가 서쪽나라 배를 만나 그 배에 있던 16나한상을 두륜산방에 봉한하였고 사찰이 폐찰되자 대흥사 옆 청신암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여행길 계곡에서 쉬어가다

 

▲ 진불암에서 내려서는 하산 숲길

▲ 하산길에서 만나는 계곡

 

 

가을 마지막 여행지로 전남 해남군 두륜산을 향했다. 사실 두륜산 보다 두륜산에 산재해 있는 불교유적 중 특히 북미륵암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해남군 방문을 할 때마다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두륜산을 찾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북미륵암을 오르지 못한 것이 마음 한켠 오래동안 마음잡았고 올해가 가기전에 꼭 찾아가리라 마음먹고 가을 마지막 여행지로 남겨 두었다.

 

대흥사 진입로 주변 가을이 온 스쳐간 듯 아니 온 듯 분위기가 묘하다. 단풍잎이 청춘이거나 말라버린 모습, 애기동백꽃이 벌써 피어나고 마지막 가을을 즐기려는 탐방객은 절간을 지나 두륜산으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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