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사계는 변화무상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사찰 속의 정원과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를 비롯하여 태백산맥 조정래의 고향이기도 하다. 경내를 돌다보면 500년 수령을 자랑하는 선암매(매실나무)와 사찰 담장너머 곱게 피어난 동백꽃, 호젓한 산길에 만나는 가을 단풍과 은행나무, 계곡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승선교, 선암사 해우소를 찾아 세상의 모든 근심과 번뇌를 훌훌 벗어 놓고 내려올 수 있는 곳이다.
▲선암사 가을전경
▲ 선암사 승선교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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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끝자락을 찾아가는 선암사 선암사유료주차장: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755-3 |
젊은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배우는 스님이 모여 사는 한국 불교 태고총림 조계산(889M) 선암사는 조계산 동쪽 자락 터 잡은 태고종의 본산이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백제성왕 5년(527) 오늘날 조계산 중턱 비로암이 위치한 터에 창건하고 ‘해천사(海川寺)’로 불렀다. 이후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가 비보사찰의 하나로 중창하면서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우고,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에 의해 중창하면서 천태종을 전파하면서 호남의 중심 사찰로 자리하였으나 정유재란 당시 철불과 보탑, 부도, 문수전, 조계문, 정측만이 남았다 한다. 이후 복원불사를 위한 많은 스님들의 노력이 따라야 했고 그 결과 오늘날 선암사는 법통과 풍광을 전승하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이 되었다.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
호암화상이 1713년 시작하여 6년에 걸쳐 만든 우리나라 최고 걸작품 다리 승선교를가 있다.자연암반 위에 아치형으로 쌓고 정 중앙에 용머리 형상을 한 용두를 박아 다리를 지탱하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다. 선암사승선교(보물 제400호) 는 화강암으로 만든 아치형 다리로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은 아름답다. 전설에 의하면 숙종 24년 호암대사가 만든 것으로 전하며, 임진왜란 당시 파손된 것을 순조24년(1824) 사찰을 중건할 당시 다시 가설하고 2003년 태풍 매미의 피해로 다시 해체복원하였다.
조선 숙종 34년(1698) 호암대사는 백일기도를 드리지만 관음보살을 만나지 못하자 자신의 불 심이 미력한 탓으로 돌리며 벼랑에서 자살을 결심하게 되지만 여인이 홀연히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대사는 그 여인이 틀림없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절 입구에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며 절 입구에 무지개다리를 만들었다는 전설과 함께 다리 옆에는 승선교비명이 새겨져 있다.
선암사 강선루
승선교를 지나면 곧장 선암사 첫 번째 관문인 강선루가 있다. 2층 누각으로 선암사 계곡에 일곱 선녀가 내려와 노닐다 올라가곤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강선루는 한쪽 방향을 터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고 중간에 버팀목을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지만 기둥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계곡으로 난 기둥은 흡사 계곡에 기둥이 발을 담든 형상을 하고 있다.
강선루는 자연을 최대한 활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조금 안쪽으로 이동시켜 만들면 굳이 냇가로 석축을 따로 길게 내세울 필요가 없지만 강선루는 자연을 최대한 배려하며 한쪽 기둥을 계곡에 세워 자연의 미를 더하고 있다.
선암사 삼인당(전남기념물 제46호) 삼인당에 도착하면 비로소 사찰로 진입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은 연못과 삼나무 세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삼인당은 길게 연못을 만들고 차밭을 따라 흐른 물이 모여들었다 나가도록 도선국사에 의해 축조되었다. 삼인은 불교사상에서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이다.
선암사 삼인당은 전남기념물 제46호이다. 경문왕 2년(862) 도선이 축조한 장타원형의 연못으로 불교의 대의를 표현한 섬을 만들어 놓은 2.2대 1의 비율로 1996년 복원공사를 하였다. 불교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연못 양식으로 선암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암사 경내로 들어서다
대웅전을 돌아 다시 오르면 건물 3채가 나란히 있는데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며, 불조전 뒤에 원통전이 있다. 원통전 옆으로 첨성각이 있으며, 원통전 뒤편으로 응진당과 무전이 있다. 중심건물 왼편으로 해천당, 적묵당, 종무소, 무량수전,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는 조계산 자락에 터를 잡은 조계종 다음으로 큰 불교 종단인 태고종의 본산이다. 조계종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사찰의 멋을 고루 갖춘 절로 태백산맥의 배경지요 작가 조정래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때 선암사는 60여동의 대가람으로 백제 성왕 시절 고구려 아도화상이 비로암 자리에 만들었다는 설이 있지만 근거가 없고 9세기경 도선국사가 남방비보를 위해 선암사의 하나로 확장 후 고려 선종9년에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선암사삼층석탑(보물 제395호)는 선암사 대웅전 앞 좌, 우에 있는 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한 석탑으로 신라 중기 이후 9세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탑은 장대석을 짜고 하대석과 중대석을 짜고 탑신부를 올렸다.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에서의 탑은 부처의 진신 사리를 봉안한 처소로서 예배의 대상이다. 선암사 삼층석탑은 대웅전 앞 좌우에 서 있는 것으로 양식과 건립 시기가 같으며 조성 연대는 신라 시대 후기인 9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탑은 신라 시대 석탑의 전형적 양식을 따른 이중기단의 삼층석탑으로 상하 각 밑단에는 면마다 3개의 기둥을 돋을새김 하였으며, 위아래 삽석의 수법도 이와 같다. 탑 몸 부분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 부분의 각면에는 양 모서리에 2개의 기둥을 돋을새김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평평하고 넓으며 받침은 각각 4단으로 되어 있고 모서리의 반전이 경쾌하게 표현되었다. 두 석탑의 조성연대는 신라 시대 후기인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1996년 이 탑을 해체 하여 복원할 때 동쪽 탑 1층 몸 아래에서 사리장치가 출토되었는데, 사리 1과가 들어 있는 금동사리함과 청자, 백자(보물 제955호) 등이 발견되어 있다.’
선암사 대웅전(보물 제1311호)
선암사 대웅전(보물 제1311호) 계단을 딛고 오른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화려한 용 문양을 자랑하던 소맷돌이 1910년대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일제강점기 당시 계단은 확장되었고 소맷돌과 법수석은 사라졌다. 1910년 사진을 통해 계단은 좌,우 두 개의 계단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 계단이 있었음을 통해 최근 변형된 부분을 정비 복원하였다.
선암사대웅전(보물 제1311호) 은 현강왕 5년(875) 선암사 창건과 함께 건축된 후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고 현종 원년(1660) 중건 되었다가 영조 42년(1766) 화재로 또다시 소실되고 순조 24년(1824) 재중건 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외3줄목, 내 4줄목의 다포식 조선후기 건축양식이다.
선암사 팔상전(전남유형문화재 제60호) 팔상도를 모신 전각으로 선암사 사적기에는 숙종 30년(1704)과 숙종 33년(1707)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남선의 심춘순례에는 팔상전에 화장찰해도를 주벽으로 모시고, 팔상도와 33조사상을 모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팔상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대웅전 보다 1단 높게 축대를 쌓았다.
원통전(전남지방문화재 제169호)
자비를 구한다는 의미의 원통전은 전남지방문화재 제169호이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셔 관음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숙종 24년(1698) 호암약휴대사가 중창하였으나 1759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23년 재중창, 1923년 재중수 한 건물이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내부에 인(人), 천(天), 대복전(大福田) 현판은 정조임금이 후사가 없자 원통전과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고 순조를 낳자 선암사에 하사한 것이라 한다.
원통전 내 어필 ‘대복전’ 편액은 조선 제23대 순조(1790-1834)의 어필이다. 정조가 후사가 없자 1788년 교궁관을 선암사에 파견하여 눌암스님과 해봉스님에게 원통각과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부탁하였고 이후 세자인 순조임금이 태어나게되니 정조가 보답으로 1796년 금병풍, 쌍용문가사, 은향로, 대복전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1801년 왕으로 즉위한 순조는 인(人,) 천(天) 두 글을 각각 44.0cm × 62.0cm 크기의 현판 두장에 새겨 하사하였다.
현종 원년(1660)에 창건한 공간으로 선암사에서 매우 독특한 공간이다. 절집은 ‘丁’자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특히 꽃문살과 국내 사찰에서 찾아보기 드문 토끼가 방아찧는 모습과 파랑새 그리고 삼태극이 매우 인상적으로 남는 곳이다. 또한 입구 우물천장에는 우아한 학의 모습과 물고기, 자라 조각이 새겨져 있다. 현재 선암사 원통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통전 어간문은 4분합문으로 중앙 2짝에 모한꽃창호로 모란과 자세하게 보면 새가 조각되어 있으며, 양쪽 바깥문 2짝에는 금강저빗살창호로 하였다. 특히 모란도 아래에 있는 궁판에는 어린시절 달에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겨 놓았으며, 그 옆으로 계수나무와 한쌍의 파랑새가 있어 궁금증을 더하는 곳이다.
원통전은 독특한 공간으로 현종 원년(1660) 조성 후 숙종 24년(1698)에 호암대사에 의하여 중수된 공간으로 중창할 당시 호암대사가 현몽을 통해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새겼다고 한다. 원통전에 관하여 다른 이야기로 눌암대사에게 부탁하여 정조가 백일기도를 드려 순조를 잉태하였는데 순조가 12살이 되던 해 그 감사의 의미로 대복전이란 현판을 하사 하였다 한다.
선암사 대각암으로 향하다 선암사에서 산길을 따라 오른다. 남들은 산을 넘어 송광사로 향하는데 그깟 대각암까지야 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수고를 해 본다. 조금 길을 따라 오르면 왼편 독특한 모습의 바위가 보이는데 이곳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광무 4년으로 1900년 대한제국 시대에 새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대각암으로 향하는 길목에 만난 마애불
마애불의 완성도는 매우 낮다. 조각 솜씨도 그러하고 입술부분 바위가 훼손된 탓인지 자비로운 모습을 엿볼 수 없지만 높이 7m 정도의 길쭉한 바윗돌에 약 4.8m 의 마애불을 새겼다. 주변에는 협시불이 없으며, 다른 조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마애불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자료 제157로이다. 마애불로부터 조금 더 오르면 탁 트인 공간과 낡은 건물의 절집을 만나게 된다. 바로 대각암으로 건물이야 선암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지만 보물 제117호 선암사 대각암 승탑이 양지바른 햇살아래 모셔져 있다. 승탑에 관한 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보물 제117호 승탑
‘승탑은 승려의 사리나 유물을 모셔놓은 일종의 무덤이자 신앙의 대상물이다. 대각암 뒷면 언덕에 세워진 이 승탑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대각국사가 이 암자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각암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선암사에는 대각국사 영정과 유품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승탑은 상. 중. 하대석으로 구성된 밑단부분과 탑 몸부분 그리고 지붕돌이 모두 8각으로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탑 몸부분에 비해 밑단부분의 중대석이 약화되어 전체적으로 볼 때 균형이 맞지 않은 듯 하나 구름무늬와 연꽃무늬는 매우 정교하고 또한 지붕돌은 장중한 느낌을 준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대각암의 옛 위세를 보여주는 대선루 앞으로 사각형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대선루 사각 창 넘어 산수유 서너 그루가 피어 봄을 알리며, 향기에 이끌려 날아든 작박구리는 허전한 공간을 그마나 채우놓고 있다. 열린 문 앞으로 놓여 있는 의자와 다리가 없는 평상처럼 쉴 수 잇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들이 조금은 낯설어 서둘러 절집을 빠져 나왔다.
선암사 산내암자 '대승암'
선암사 산내 암자 4곳 중 가장 한적한 ‘대승암(大乘庵 또는 남 암)’을 찾아 길을 나선다. 대승암으로 가는 길은 편백나무 숲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면 서부도군 건너편 다리를 건너 곧장 숲길을 따라 오르거나 차량이 다니는 큰길을 따라 대승암 이정표를 따라 진행하면 된다.
선암사에서 대승암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나는 가을은 선암사 여행의 숨겨진 또 다른 매력이다. 오래된 숲길을 따라 오르는 길에는 침엽수 편백나무와 활엽수 굴참나무 숲 사이로 대승암으로 향하는 옛길이 이어져 있다.
옛 절의 흔적을 먼저 만난다. 옛 길의 통문입석이 나란히 서 있다. 대승암은 일제강점기 당시 7동의 전각이 있었다 전하지만 지금은 입구에 간판마저 제자리를 잃고 있을 만큼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건물에 유락장으로 사용되자 1955년 헐어 버렸다 한다. 그리고 1999년 지허 스님은 도백(허경만)의 지원으로 거주공간을 닮은 ‘ㄷ’건물 한 채가 세워졌는데, 선암사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하고 있다.
대승암 본당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며, 산신각, 문간채, 요사채가 하나의 지붕을 하고 있으며, 본당 건물 뒤편에 작은 공간으로 만든 산신각이 있으며, 왼편으로 산죽숲길이 보일락 말락 있다. 산죽숲길이 인도하는 길을 조금 이동하면 선암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도착한다.
선암사에는 일반 사찰에서 없는 3가지가 있으니 사천왕문, 협시보살상, 대웅전 어간문이다. 사천왕문이 없는 이유는 선암사에게 자락을 내어 준 조계산 주봉이 장군봉이라 하여 굳이 사천왕을 모시지 않으며, 대법당에는 흔히 삼불을 안치하는데 비해 협시불을 두지 않고 본존불만 모시며, 대웅전 출입문 정 중앙이 없다. 아니 문이 없다기 보다 큰 창을 만들어 놓고 있어 정문은 출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사찰 큰법당은 부처가 출입하는 문이라하여 큰 사찰에서도 큰스님이 아니면 중앙문 출입은 삼간다. 이곳 선암사는 부처처럼 깨달은 경지에 이른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 하여 출입문 대신 창문을 열어 놓았다.
선암사는 사적 제507호이며, 명승 제65호이다. 불교문화재로 보물급은 대각암 동종(보물 제1561호),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 선암사 동탑발견 사리구(보물 제955호), 대각국사 진영(보물 제1044호), 선암사 대각암 부도(보물 제1117호), 선암사 북부도(보물 제1184호), 선암사 동부도(보물 제1185호), 대웅전(보물 제1311호)이며, 중요민속자료로 선암사 소장 가사탁의(중요민속자료 제244호)가 있다. 유형문화재로 선암사 불조전(전남유형문화재 제295호), 금동은입사향로(전남유형문화재 제20호), 전 도선국사 직인통 1(전남유형문화재 제21호), 전 도선국사 직인통 2(전남유형문화재 제21호), 직인통 1(미지정), 직인통 2(비지정), 선암사 팔상전(전남유형문화재 제60호), 선암사 중수비(전남유형문화재 제92호), 선암사 일주문(전남유형문화재 제96호), 선암사 원통전(전남유형문화재 제169호), 관동관음보살좌상(전남유형문화재 제263호), 선암사 측간(전남유형문화재 제214호) 및 문화재자료는 선암사 각황전, 선암사 마애여래입상 등이 있다.
선암사는 아도화상에 의해 신라 진평왕 3년(542) 현재 비로암터에 해천사를 세우고, 헌강왕 1년(875) 도선국사(827-898)가 현재의 터로 옮겨 1차 중창, 고려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1055-1101)에 의해 2차 중창, 조선 현종 1년(1660)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사찰을 경잠, 경준, 문정 스님에 의해 재건, 영조 35년(1759) 4차 중창 및 1761년 청량산 해천사로 사명을 변경, 1819년 5차 중창 및 1823년 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였고, 1825년 선암사로 다시 복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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